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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Feb 24. 2023

휴대폰을 내려놓으면 보이는 것들

  사람들은 각자 스트레스를 느끼는 방법이 다르다. 누구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가 콕콕 쑤시기도 하고, 누구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도 하며, 누구는 식욕이 뚝 떨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몸에 신호가 온다. 나도 물론 그런 신호가 있긴 한데 내 신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 독특하다. 나는 보통 스트레스를 받으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탔을 때 내릴 곳을 지나친다. 의식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정신을 놔버리는지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내릴 역을 지나치면 '아 내가 자각을 못했지만 나 요새 스트레스받는구나?'하고 생각하곤 한다.


  

  얼마 전에도 내릴 역을 지나친 적이 있다. 퇴근하던 중이었는데, 지하철을 타고 오다가 집 근처 역을 지나쳐 한 정거장을 더 가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내렸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왕 내릴 역을 지나친 김에 아예 집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사는 곳이 경기도인지라 지하철 역간의 거리가 서울보다는 꽤나 먼 편이지만 오히려 더 잘된 셈 치기로 했다. 산책 겸 사색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내면을 다스리면서 귀가할 계획이니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고 보지 않기로 했다.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이어폰도 끼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귀갓길에 오르자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하철 역을 나서려고 기나긴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그랬더니 그 긴 에스컬레이터에 열몇 명 정도의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선 휴대폰만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날씨가 좋아서 머리 위로 맑은 밤하늘이 보이고 상쾌한 공기가 들이쳤지만 아무도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역 앞에서 본인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으면 다들 휴대폰을 보지 않고 역 밖을 바라보면서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찾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을 나와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많이 조용했다. 개천이 흐르는 다리를 지나니 언덕인지 산인지 모를 경사 옆으로 난 조그마한 길이 보였다. 얼마나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지, 보도블록이 이제 막 깐 것처럼 너무나도 가지런히 깔려있었다. 길 오른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등이 켜져 있었지만, 가로등 간의 간격도 꽤 되고 등도 그리 밝지 않아서 그런지 길은 전체적으로 약간 어두웠다. 왼쪽에는 산경사, 오른쪽에는 가로등과 차도를 끼고 도보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집을 향해 길을 걷다 보니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기 시작했다. 손을 잡고 다정히 걷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부부가 보였다. 둘 다 등산복을 입고 걷고 있었는데 뭔가 남편분이 재미있는 농담을 던졌는지 아내분이 중간에 한번 자지러질 듯이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두 분은 손을 꼭 잡고 내 옆을 지나쳐갔다. 그리고 뒤이어 바람막이와 반바지를 입고 뛰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아마 저녁 운동을 하는 사람인 듯했다. 날이 그래도 꽤 쌀쌀한 편이라 운동을 한다한들 반바지로는 좀 추울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 옆을 지나가는 순간 그 사람 얼굴에서 엄청나게 땀이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꽤나 오래 전력질주를 한 듯 싶었다. 그 정도면 반바지여도 춥지 않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잠시 후 그 뒤로 느릿느릿 걸어오시는 할머니 한분과 학생이 보였다. 할머니는 장을 보셨는지 물건이 가득 든 장바구니를 들고 계셨고, 학생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일행은 아닌 듯 보였지만 둘 다 집으로 향하는 듯했다. 5분여를 더 걸어가니 이번에는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와 재밌게 통화를 하는 듯했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갈 때 들린 대화로 미루어 추측건대 아마도 이제 막 교제를 시작한 애인과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이 외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들을 하나 둘 관찰하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까지 와있었다. 노래를 듣지 않아도, 유튜브를 보지 않아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거리를 거닐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다들 이렇게 거리를 거닐었을 텐데 어느샌가 모두 이런 것들을 잊고 다니는 게 아닌 게 싶었다.



  예전에는 스트레스로 인해 내릴 곳을 지나치면 전에는 짜증부터 밀려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럴 때마다 어떤 새로운 풍경을 접하게 될지 어떤 사람들을 보게 될지를 기대하며 천천히 되돌아오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휴대폰은 잠시 넣어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오면 어느샌가 스트레스도 많이 풀려있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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