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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Jul 24. 2023

우리가 오래 살아온 공간에는 상처가 있다


  예전에 김영하 작가가 알쓸신잡 3에 나와서 우리가 오래 살아온 공간에는 상처가 있다는 얘기를 했다. 

  왜 사람들이 호캉스를 떠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얘기였다. 김영하 작가는 사람들이 호캉스를 떠나는 이유는 집에는 근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탁기를 보면 빨래를 돌려야 하고 싱크대를 보면 설거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미국의 유명 작가들 중에도 상당수가 글을 집필할 때는 싸구려 모텔을 빌려서 작업을 한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가 오래 살아온 공간인 집에는 근심과 상처가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호캉스를 가는 것일 거라 말했다. 


  김영하 작가의 말이 100퍼센트 맞는 말은 아닐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상당 부분에 동의하는 편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이전의 집들을 떠올리면 각각 집에 따른 추억들이 떠오른다. 안타깝게도 그 추억들의 대부분은 아픈 기억들이다. 몸이 아파서 누워있던 방, 취업 스트레스로 엄마와 다퉜던 거실, 옛 연인과 종종 통화를 하며 집으로 향했던 길 등 다 나에게 상처로 남은 기억들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이사를 갈 때 약간은 홀가분해지기도 했다. 나의 상처가 깃든 그 공간들을 더 이상 드나들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 그런 곳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회사다. 회사를 다닌 지 만 10년이 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그동안 거쳐온 집들보다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의 특성상 물리적으로는 위치와 건물을 계속 옮겨 다녔지만, 심적으로는 한 곳에 10년 넘게 소속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회사에서의 기억들이 나에게 상처로 남았다. 아무리 물리적인 위치를 옮긴다 한들, 내가 소속된 곳이 이 회사, 이 부서인 이상, 그 기억들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는 이곳을 그만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홍대에서 내 인생의 마인드 맵을 그리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본 적이 있다. 그때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3가지 중에 1가지로 회사가 나왔었다. 그만큼 지금 회사는 나에게 여러 가지로 의미가 큰 곳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을 떠나기보다는 이곳에서 잘해보고 잘 지내고 싶었다. 당연히 이곳의 사람들과도 많은 인연을 맺어왔기에 더더욱. 하지만 이제는 아픔을 감수하고라도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이곳에서 얻은 상처는 이곳에 남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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