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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Aug 07. 2023

아직까진 체념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에 'ARMS'라는 만화가 있다. 외계 광석을 기반으로 만든 나노머신을 주입받은 주인공이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어떤 조직과 맞서 싸우는 내용의 만화다. 그 만화에는 여러 명대사들이 나오는데 그중에 '사람의 발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 사람을 앞으로 가게 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라는 말이 나온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주변 환경에 체념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나아가라는 의미로 쓰인 말이다.



  저 말대로 누구나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지만, 생각보다 사람은 그렇게까지 강한 존재는 아니기도 하다. 생각 외로 무너지기도 쉽고 많이 힘들어하기도 하며 때로는 스스로 생을 포기하기까지 한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고 싶어 하고, 그 대상에게 많은 것들을 의지하려 한다. 그 의지의 대상은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사상일 수도, 종교일 수도 있다. 심지어 그 대상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간다 할지라도 맹목적으로 믿고 의지하기도 한다. 반대로 그렇게 의지할 대상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도 나약하고 쉽게 무너진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중국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일본 만화인 '킹덤'에서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진나라 장수 환기(실제 이름은 환의)에 대해 조나라 장수 이목이 이렇게 평가한다. 완전히 절망하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계속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그래서 환기는 자꾸 사람들을 다 죽이려고 들지만) 



  만화 ARMS에서는 절망 속에 체념하는 것보다는 의지를 갖고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좋은 것이라는 교훈을 준다. 반대로 만화 킹덤에서의 환기를 보자면 오히려 절망하고 체념하지 못했기 때문에 분을 삭일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분노를 쏟고 인질들이나 포로들을 자꾸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어떻게 보면 환기는 차라리 체념해 주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이처럼 절망 혹은 체념이라는 개념에 대해 양쪽의 말이 다르면서도 둘 다 일리가 있는 것을 보면 이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을 나타내는 게 아닌가 싶다. 늘 우리는 옳고 그름으로, 흑과 백으로, 위와 아래로 명확하게 나누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삶에서 저렇게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부분을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 빵 하나를 훔친 도둑놈은 주인에게는 죽일 놈이지만 그 훔쳐온 빵으로 연명하는 자식들에게는 좋은 아빠일 것이고 회사에서 무능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서 나가지도 않는 부장은 알고 보면 아내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눈총을 받으면서도 모른 척 앉아있는 것일 수도 있으며 나에게 늘 잔소리하고 간섭하고 훈계하는 친구 녀석이 내가 상을 당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와 주기도 한다. 이처럼 삶은 언제나 모호하기 그지없는 모양을 하고 있다.


  얼마 전 점심을 먹고 후배와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삶의 힘듦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던 도중, 내 주변의 잘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드디어 이만큼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봤자 겨우 그들과 같은 출발선상에 다다른 것에 불과하고 그들은 바로 그 출발선에서 시작하여 부모의 도움이나 다른 여러 요소들로 인해 나보다 이미 앞서 나가고 있다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따라잡거나 제치려면 지금보다 더한 노력을 하거나 더한 운이 따라줘야 하는데 이제는 지친다고. 그리고 그 사실이 너무 괴롭다고 했다.

  그러자 후배가 말하길, 그러면 나만 더 괴로워질 뿐이라고 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으며 그냥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했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성적으로는 후배의 말이 백번 맞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속으로는 포기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나도 그들처럼 잘 살고 싶고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후배와 대화를 나눈 날, 퇴근하고 집에 가던 중 위의 저 두 말이 떠올랐다. 처음에 나는 ARMS에서의 말대로 체념하지 않고 의지를 갖고 나아가는 삶을 영위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이만큼을 이뤄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며 체념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괴로운 게 아닌가도 싶었다.

 

  요즘에는 만약 이제까지의 몇십 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체념하고 자리에 그대로 앉아버리게 된다면, 내가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매우 두렵기도 하다. 체념하고 편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긴장이 풀리다 못해 사람이 아예 망가질 것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나를 아는 주변인들은 내가 아무리 풀어진다 한들 내 성격으로 미루어 봤을 때 절대로 망가질 수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잠재적으로 내 혈육 중에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사람을 봐왔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체념한 내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너무 망가질까 봐 두려운 마음이 더 크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도 한 줌의 희망을 가지고 체념하지 못한 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괴로워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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