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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Feb 28. 2022

일제 침략의 아픈 역사 현장, 외양포 포대

가덕도 외양포, 새바지항, 대항항을 걷다.

대항 전망대에서 대항항를 바라본다. 이 일대가 가덕 신공항 예정부지다. 부산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대륙 침략 전초기지가 있었던 곳에 동북아 물류허브를 만들 꿈을 꾸고 있다. 공항과 항만, 철도를 연계한 '트라이포트' 완성을 통해 부산의 운명을 바꾸려 한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 특별법'이 20년에 걸친 희망 고문(?) 끝에 통과를 앞두고 있어, 혹시 사라질지도 모르는 대항동 근대 역사 유적지를 다시 찾는다.


거가대로 천성 IC에서 대항 전망대 방면으로 방향을 잡는다. 대항 전망대에서 대항항을 조망한다.

외양포로를 따라가다가 새바지 입구 회전 교차로를 지나고 양포 고개를 넘는다. 이내 화장실을 갖춘 공용주차장이 나온다. '가덕도 관광안내판'과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산책로와 야생화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우리는 외양포항 선착장까지 내려가서 '대항낚시' 앞에 주차한다.


외양포 마을은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의 주둔지였던 외양포 포대 사령부 터가 있다. 또한 일본 육군 포병사령부 헌병대가 사용하던 건물, 화장실, 막사, 일본군 관사, 병원 시설, 무기고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외양포 선착장 입구의 대항 낚시점은 평범한 민가인 것 같지만, 1905년 당시 일본군 진해만 요새 사령부의 헌병부, 위병소 등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다다미방, 창고와 욕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증축ㆍ변형되었다.


대항낚시 건물 뒤편으로 난 가덕해안로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마을을 들어선다. 울타리에 미역을 널어 말리고 있다.

외양포 마을의 행정동은 가덕동이고, 법정동은 대항동이다. 외항포(外項浦)는 산너머 대항(大項)의 바깥쪽 잘록한(목[項]) 포구라는 뜻인데, 공식 지명은 외양포(外洋浦)가 되었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 일본군이 철수하자,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와 일본군 막사와 관사의 시설을 개조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적산을 배분하면서, 작은 관사는 2세대, 좀 더 큰 막사는 4세대, 5세대 등으로 다세대가 거주하게 되었다.

동네로 들어서면 옆으로 길쭉한 건물을 만난다. 누가 봐도 군 막사다. 그런데 여러 가구가 사는 것 같다. 건물 벽 창문가에 키가 달려 있다. 곡식을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로 요즘은 보기 힘들다. 이들이 잠자다 오줌을 싸면 옆집에 소금 얻으러 다니는 벌을 받는데, 이것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당시 사무실 및 하사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누운 파도 모양의 일본식 기와가 올려져 있다.

외양포 일본식 가옥의 특징인 햇볕이나 비를 막기 위해 창문 위로 처마 같은 지붕을 얹어 설치한 눈썹 지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집이다. 벽은 널판을 비늘처럼 붙여 마무리한 비늘판 벽이다.


붉은 벽돌 기둥에 일본식 가와가 올려진 일본군 우물인데, 일명 '헌병 샘'이라 한다. 외양포에는 우물이 9개 있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우물이 많았다는 것으로 보아 양포 포병 사령부에는 꽤 큰 규모의 일본군이 주둔하였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지나다 보면 한 건물인데 지붕이 다른 건물이 많다. 한 지붕 밑에 여러 세대가 살면서, 각자 다른 색깔로 지붕을 개량하여 생긴 기이한 풍경이다. 지붕을 보면 몇 세대가 사는지 알 수 있다. 이 집은 벽면의 색깔도 다르다.

마을의 끝머리에 아낙네가 파종을 위해 밭을 손질하고 있다. 앞바다에는 대죽도가 떠 있고 뒤로 저도, 거제도 본섬이 보인다. 오른쪽 바다 밑으로 침매터널이 지나간다.


1904년 러시아 제국과 일본제국은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무력충돌을 선택하였다. 1904년 2월부터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외양포에 포진지 설치를 계획한다. 이곳에 있던 마을을 불태워 주민을 강제 이주시킨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기도 전의 일이라는 점이 더욱 기가 막힌다.


1904년 8월부터 12월까지 공사를 완료하여 1905년 5월 일본군 제4사단 휘하 진해만 요새 사령부의 발상지를 만들었다. 러시아 함대와의 해전에 대비한 군사기지였다. 무적함대라 불리던 러시아 발트함대를 수장시켰던 쓰시마 해전에 앞서 포사격 연습을 하였던 기지가 이곳이다.

해로를 이용하던 옛날에는 들머리 선착장 기준으로 마을의 안쪽에 포진지가 있다. 진지 입구에 사령부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1905년(명치 38년) 4월 21일에 부대 편성 명령이 내려지고 같은 해 5월 7일에 편성된 부대가 외양포에 상륙했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세워졌다.


엄폐 막사는 2개소가 있는데, 앞부분은 반원의 아치 형태로 된 진입구 1개와 창호 2개로 구성되어 있고, 뒷부분에는 통로가 있어 각 실이 연결되어 있다. 탄약고는 전실과 내실로 구분되어 있다. 내실의 진입구는 외부로부터 내실을 보호하기 위해 이중으로 엇갈리게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탄약고 옆에는 낮은 담장을 길게 설치하고 사이사이에 아치형 홈을 파 놓은 것은 포탄을 발사할 때 나는 굉음을 흡수하는 방음벽이다.

엄폐 막사 앞의 탄약고와 탄약고 사이에 2개씩 포좌를 설치하여 총 6문의 280mm 유탄포를 배치하였다. 막사와 탄약고는 들어가는 입구를 제외한 모든 면을 구릉으로 만들었다. 그 윗부분은 잔디를 깔고 대나무를 심어 은폐ㆍ엄폐하였다. 다시 포진지 입구로 내려오니 당시 병사들이 사용했던 화장실이 남아 있다.


마을과 포대를 벗어나 산책로를 걷는다. 야생화 단지와 쉼터를 지난다. 외양포로를 건너 생태 탐방로를 걷는다. 국수봉을 오른다. 수리의 서식지로 알려진 '수리산 만디이'라 하던 국수봉 제가부터 산마루에 일본군 해군 관측소가 있었다고 하여 '관측산'이라고도 부른다.

'수리산 만디이'로 올라가면서 포진지 전경과 외양포 마을을 돌아본다. 외양포 앞바다에 신항으로 들어가는 화물선이 계속 지나간다.


산 옆을 돌아 화약고 터를 다녀온다. 일본군이 군사시설로 설치하여 화약고로 사용하던 곳으로 현재 건축물은 없고, 콘크리트 줄기초만 남아 있다. 줄기초의 우측면이 화강암 석축으로 형성된 것으로 미루어 봐서 나머지 면도 석축이 쌓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현지 안내문은 설명하고 있다.

똑바로 잘 정비된 길이 갈지자로 산을 올라간다. 일본군이 군수물자를 운송하기 위하여 조성한 길이다. 말을 타고 다니던 길이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말길'이라 불렀다. 포진지 뒤에서 탄약고, 관측소를 거쳐 산악 보루, 벙커로 이어진다. 최근 당시 석축 기술과 산길 개설 방법에 대한 보전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선정됐다. 외양포 앞으로 범여섬, 대죽도, 저도, 거제도가 보인다.

국수봉 인근 해발 250m 산악 고지에 위치한 관측소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 있다. 전면이 관측실이다. 관측실 중앙에 둥근 부분이 관측기 받침대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관측실 후면의 엄폐부는 관측한 자료를 계산하여 포대에 전달할 수 있는 계산ㆍ통신실의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측면에 소형 망대가 있다. 화강석 계단으로 올라간다. 멀리 산 아래 남쪽 바닷가 언덕에 가덕도 등대가 나무 사이로 희미하게 보인다. '가덕도 항로 표지 관리소'다. 구 한말, 마산항의 개항으로 일본과 러시아의 조계지가 설치되고 일본군 진해만요새사령부가 들어서니 출입하는 선박들이 늘어난다. 1909년 이곳한국, 일본, 유럽의 건축 양식이 함께 어우러진 구조의 등대를 세운다.

가덕도 등대는 2003년 9월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50호로, 2006년 12월 해양수산부 등대 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되었다. 시설 대부분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를 함께 갖춘 문화재로, 전국의 아름다운 등대 16경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주변 경관도 아름다워 꼭 가 보고 싶은 곳이다.  하지만 부산지방해양항만청을 통하여 해군사령부의 출입 승낙을 받아야 하는 군사시설보호구역이라 뜻을 이루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굴참나무 오솔길을 따라 해발 264.5m인 국수봉으로 향한다. 예로부터 해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하는 최전방 진지인 가덕도에는 두 개의 국수봉이 있다. 최남단 외양포와 최북단 눌차도의 두 봉우리다. 외양포 국수봉은 전장에 나가 싸우는 남성을, 눌차 국수봉은 이를 지원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을 상징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국수봉을 넘어서니 대패집 나무가 많이 보인다.

관측소에서 700m 떨어진 곳에 산악 보루가 있다. 포대의 배면 방어를 위해 설치된 보루다. 해안포대의 배후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륙한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산 정상인 국수봉 인근에 구축하였다. 삼각형 형태의 구조물로 화강석으로 석축을 쌓고 외부에 토사를 비스듬히 쌓아 올린 형태다. 내부에는 계단이 있어 석단을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연대봉이 보인다. 연대봉에는 임진왜란 때 대마도에서 부산포로 침략해오는 왜군 함대를 최초로 발견하고 보고한 봉수대가 있다.



대항 새바지 마을로 들어선다. 


이곳은 샛바람(동풍)을 받는다고 새바지 마을인데 동선 새바지와 구분하여 대항 새바지라 부른다.


어부가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등대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방파제에 바닷물이 넘쳐흐르는 듯 한 벽화가 그려져 있고, 그 넘어 갯바위에는 낚시꾼들이 붙어 있다. 이런 평화로운 마을에도 아픈 상처가 남아 있다.

러일전쟁 이후부터 태평양전쟁 종전까지 주둔한 일본군이 자갈 해변 중앙에 동굴을 뚫어 진지를 만들어 놓았다. 강원도 탄광 근로자를 강제로 징집하여 만든 인공동굴이다.


연합군의 해안 상륙을 저지할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기관총과 야포를 배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굴은 반대편 자갈 해변으로 통하도록 파놓았다. 최근 동굴 입구 바위가 무너져 출입이 통제되었다.



대항항으로 넘어간다.


대항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초등학교, 해양파출소, 보건소가 있는 대항동의 중심 마을이다.


천가초등학교 대항분교는 일제강점기인 1941년 개교해 1,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뒤 1994년 천가초교의 분교로 개편된 유서 깊은 학교다. 학생 수가 점점 줄어 전교생이 5명만 남아, 2013. 2. 28일 개교한 지 72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

어촌 체험 마을과 민박집, 펜션, 음식점, 카페도 보인다. T자 모양의 방파제가 포구 중앙에 있좌우에 등대가 있다.


대항항 앞바다는 숭어잡이로 유명한 곳이다. 가수 함중아는 '내 고향 가덕도' 에서 '대항포 앞바다에 숭어 떼 춤을 추면 ~ ~ '이라고 노래했다.


방파제에서 마을을 바라본다. 대대로 고기 잡으며 살아온 아름다운 어촌 마을이다. 이곳에 공항이 들어선다고 한다. 가덕 신공항 조감도를 보면 이 아름다운 마을의 들머리인 목을 넘어 새바지 쪽으로 신공항이 생길 예정이다.

가덕도가 해양세력의 대륙침략을 위한 전초기지로 지리적 장점을 가지고 있다면, 역으로 한반도에서 태평양으로 뻗어 나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중심에 대항동 세 포구가 자리하고 있다. 수도권 일극주의 극복과 국토 균형발전의 견인차가 될 희망찬 가덕 신공항 사업 뒤에 이곳 주민들의 아픔이라는 그늘이 있다. 바다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과거 권위적인 정부 시절과 같이 국가적 사업이라 하여 주민들의 일방적 희생 아래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군의 침략에 희생됐던 지역 주민의 후세가 다시 국가 발전을 위해 희생되어서는 그 뜻이 퇴색될 것이다. 현명한 상생의 길을 모색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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