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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Jun 18. 2023

'말없이 그리움을 머금은' 수국이 피었습니다.

혼인지

한낮의 햇빛이 제법 따갑다. 올레길 걷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우리들의 탐방길은 한라산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간다. 길섶에 산수국이 여름임을 알린다. 여름은 수국의 계절이다. 유채꽃 천지였던 제주는 수국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알록알록 탐스럽게 만개한 수국이 초여름의 더위를 식혀준다.

알록알록 탐스럽게 만개한 수국이 초여름의 더위를 식혀준다.


여름의 꽃, 수국


안덕면에 사는 이 선생님이 안덕곶자왈 가는 길의 수국 축제 소식을 전해 준다. 뿐만 아니다. 휴애리, 한림공원, 카멜리아힐과 같은 농원이나 공원에서도 수국 축제가 한창이다. 탐라산수국의 본향답게 사려니숲길, 시험림길, 오름, 곶자왈에도 산수국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제주에는 수국 명소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우리는 비 온 다음 날, 혼인지를 찾는다. 삼성혈에서 솟아난 탐라국의 시조 고·양·부(高梁夫) 세 신인과 벽랑국 세 공주가 만나 합동 혼례를 올린 연못, 혼인지. 이곳 역시 제주의 수국 명소 중 한 곳이다. 신부의 손에 들린 부케 같은 보라, 분홍, 연두, 파란색의 수국이 혼인지에 만개했다.

혼인지에 핀 수국

예식장이었던 연못가를 한 바퀴 돌고, 세 신혼부부의 신방이었던 신방굴, 벽랑국(碧浪國) 삼 공주(三公主)의 위패를 봉안한 삼 공주 추원사, 전통 혼례관으로 이어지는 혼인지 일대는 탐방로를 따라 수국이 활짝 피었다.

삼 공주 추원사


화려한 '헛꽃'의 생존 전략


꽃은 5월 말부터 7월경에 핀다. 가지 끝에 작은 꽃이 모여서 하나의 큰 꽃을 이룬다. 꽃자루가 아래쪽의 꽃일수록 길고 위쪽의 것일수록 짧아, 각 꽃이 거의 평면으로 마치 펼쳐 놓은 우산처럼 가지런하다. 그 모습은 수국의 중국어 명칭인 '비단으로 수를 놓은 것 같은 둥근 꽃'이란 뜻의 수구화(繡毬花)에서도 연상된다.

'비단으로 수를 놓은 것 같은 둥근 꽃'이란 뜻의 수구화(繡毬花)

그 작은 꽃 안에 좁쌀보다 작은 꽃이 또 있다. 그게 진짜 꽃이다. 꽃잎은 4~5장이지만 꽃이 피면서 곧 떨어진다. 3~5장의 커다란 꽃받침 잎이 남아 꽃잎처럼 보인다. 헛꽃이다. 꽃받침이 변형된 크고 예쁜 가짜 꽃으로 벌과 나비를 끌어들인다. 살아남기 위한 기가 막힌 생존전략이다.

화려한 헛꽃

자생하는 야생 산수국과 탐라수국은 열매를 맺지만, 개량종 수국은 수술과 암술이 퇴화하여 작고 열매가 열리지 않아 삽목으로 번식한다. 다음 해에도 꽃을 보려면 꽃이 질 때쯤 가지치기를 해야 다. 그냥 두면 잎만 난다.


물을 좋아하는 '도깨비 꽃'


수국의 꽃말은 '변심'과 '진심'이다. 하나의 꽃에 상반된 두 개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 수국의 색깔이 변화무쌍하여 종잡을 수 없어 '변심'이라 한다. 수국꽃은 처음 필 때 노란색이 도는 흰색을 띠던 것이 파란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연분홍색, 연두색, 붉은색, 보라색 등으로 피는 시기에 따라, 토양의 성분에 따라, 수분의 흡수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색깔을 바꾼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수국을 도깨비 꽃이라 한다.

수국의 색깔이 변화무쌍하여 꽃말을 '변심'이라 한다.

곧 장마가 시작된다. 수국(水菊)은 여름 장마를 알리는 물의 꽃이다. 물을 좋아하여 습지에서 잘 자란다. 물이 부족하면 시들시들하다가도 물을 주면 금세 생기를 되찾는다.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물을 머금은 수국을 바라보며, 사랑에 목마른 연인이 상대의 '진심'에 감동을 받아 편안해지는 모습을 떠올린다. 여름 장마철 수국 정원은 망중한의 멋을 빚어낸다.

빗물을 머금은 수국에서 '진심'을 읽는다.

전통 혼례관 앞 잔디밭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어른들은 모두 수국에 관심을 보이고 있고, 관중은 달랑 아이들 세 명뿐이지만 하모니카 연주자에서 오카리나 연주자로 공연은 계속된다.

공연은 계속된다.




솔오름에서 산수국을 만난다. 일본에서 수많은 품종이 만들어져 전 세계의 정원을 장식하는 관상용 수국에 비하면 꽃의 크기가 작고 풍성하기도 보잘것 없다. 화사하진 않지만 시골 아낙처럼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수줍은 듯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요란하지 않게 살짝 드러내는 청초한 모습에 발걸음을 멈춘다.

솔오름의 산수국

시인 김인호 님은 왕시루봉 느진목재를 오르면서 산수국의 애잔한 삶을 들여다본다.  'ㆍㆍㆍ칙칙한 숲 그늘에 가려 / 잘디잘고 화사하지도 않은 / 제 꽃으로는 어쩔 수 없어 / 커다랗게 하얀, 혹은 자줏빛 / 몇 송이 헛꽃을 피워놓고 / 벌나비 불러들여 열매를 맺는 ㆍㆍㆍㆍ'<김인호 산수국에서 발췌>


제주의 후덥지근한 여름도 수국이 있어 시원하다. 야외활동을 막는 장대비가 하루 종일 내려도 빗물을 머금은 수국이 피었기에 서정성을 살려낸다. 제주 전역에 '말없이 그리움을 머금'은 수국이 피었다. (2023.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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