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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Jun 21. 2023

멧돼지에 막힌 길

영실 / 윗세오름 / 남벽 분기점 / 어리목

윗세오름 등반을 할까 하여 지도를 검색해 본다. 윗세붉은오름이 나온다. 윗세오름은 윗세대피소 근처 삼거리를 지목한다. 왜 그럴까?


한라산 정상 서쪽 윗세오름 대피소 주변크고 작은 3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이어져 있다. 이를 아래쪽 1100 고지 근처에 있는 세 오름(삼형제오름)에 대응하여 윗세오름이라 한다.

산철쭉 지대

몇 년 전 성판악 코스로 백록담을 올랐다가 지루한 돌길에 혼이 났다. 하산길이 무리가 되어 발바닥에 탈이 나서 상당 기간 병원 신세를 졌다. 한라산 등반은 처음부터 생각지도 않았는데 용욱이네의 추천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 제주올레의 마침표를 한라산에서 찍자. 올레길을 걸으면서 어디서나 바라보던 한라산을 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제주의 영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하며 윗세오름 등반을 계획한다.


영실매표소에서 영실휴게소까지 2.5km의 진입로는 차가 오르내린다.  출입할 수 있는 차량수를 통제하고 있어 통행량은 많지 않다. 덕분에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 들머리부터 온통 짙은 녹음이 우거져 숲 속이 컴컴하다. 팥배나무를 노박덩굴이, 비목나무에 담쟁이덩굴이 타고 오른다. 때죽나무의 흰꽃이 떨어져 보도를 덮고 있다. 졸참나무, 단풍나무, 굴거리나무, 산수국 그리고 땅바닥을 기는 조릿대 등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팥배나무, 비목나무, 때죽나무(왼쪽부터)

영실 휴게소에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영실코스는 한라산 오르는 길 중 가장 짧은 서남쪽 등반로다. 영실휴게소에서 남벽분기점까지 편도 5.8km 거리로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영실매표소 기준으로는 8.3km, 3시간 15분이 걸린다.


탐방로는 입구부터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곰솔과는 다른 모습을 한 붉은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나무껍질이 얇고 붉은빛을 띠고 있다. 겨울눈 또한 붉은색을 띠며 해발 900~1,300m의 지점에서 자란다. 솔바람 소리가 상쾌하다.

소나무

등산로는 계곡을 따라간다.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 착각이 일어난다. 마른 계곡이다. 물이 바위 틈새로 스며들어 지하로 흐른다. 비 온 뒤가 아니면 계곡에 물 보기가 쉽지 않다.


영실기암, 설문대할망과 오백나한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니 영실기암의 장대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휘이~ 휘이~ 기암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신령이 사는 곳, 영실기암의 신비로운 기운을 느끼게 한다.

영실기암

영실기암은 한라산을 대표하는 영주십경 중 하나다. 봄은 꽃, 여름에는 녹음, 가을은 단풍, 겨울에는 눈. 사계절 내내 어느 하나 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한라산 정상의 서남쪽 산허리에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과 흡사하여 이곳을 영실이라 일컫는다. 기암괴석들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 즐비하게 늘어서 하늘을 받치고 있다. 병풍바위다.

병풍바위

연이어 하늘로 치솟은 오백 여개의 돌기둥이 늘어선다. 그 모습이 오랑캐를 물리치는 장군의 형상이라 생각하여 오백장군이라 부르기도 하고, 수백의 아라한이 서 있는 것 같다 하여 오백나한이라 부르기도 한다.

설문대할망에게 오백 명의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설문대할망은 실수로 아들들이 먹을 죽을 끓이던 큰 가마솥에 빠져 죽었다. 외출 후 돌아온 아들들은 여느 때보다 맛있게 죽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귀가한 막내가 죽을 뜨다가 뼈다귀를 발견하고 어머니의 고기를 먹은 형들과 같이 살 수 없다 하여 차귀도에 가서 바위가 되어버렸다.  나머지 499명의 형제도 한라산으로 올라가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영실기암은 '오백장군' 또는 '오백나한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백장군(오백나한)

고개를 돌려 산 아래로 내려다본다. 크고 작은 오름들이 녹색 파도가 되어 밀려오는 듯하다. 해안으로 가면서 녹색은 점점 바다색으로 바뀐다. 운해가 아름답다. 어디까지가 구름이고,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구분이 힘든다.

숲의 바다에 녹색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오름들

계단을 오르면서 한발 올려놓고 꽃을 보고, 또 한발 올려놓고 꽃을 본다. 여러 가지 꽃이 피어 있다. 민백미꽃이 '그대 곁에 있고 싶어요'하며 '용감'하게 하얀 얼굴을 내민다. 병 모양의 노란 꽃이 피어나 점차 붉어지는 병꽃나무, 장미과의 마가목도 하얀 꽃 뭉치를 '신중'하게 내민다. 그래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구상나무다.

민백미꽃, 병꽃나무, 구상나무, 마가목(왼쪽 위에서부터 시계 침 도는 방향으로)

이제 가파른 계단이 거의 끝나고, 등산로 왼쪽은 지구상에서 오직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구상나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라산의 울창한 숲


등산로 오른쪽은 점차 수목의 높이가 낮아져 시야가 트인다. 영실기암의 우거진 숲이 드러난다. 쥐라기공원 같은 풍경이다. 한라산은 울창한 숲에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그 숲은 노루, 오소리, 제주족제비, 다람쥐 등의 포유류와 굴뚝새, 박새, 곤줄박이, 직박구리, 소쩍새, 큰오색 딱따구리 등의 수많은 산새들의 좋은 은신처가 된다.

한라산의 울창한 숲

윗세오름을 오르는 등산로의 마지막 전망대다. 서귀포 일대의 오름과 시가지, 범섬, 마라도, 가파도, 형제섬 등 서귀포 남쪽 바다도 한눈에 들어온다. 군산, 산방산, 단산, 송악산이 황우치해안, 사계해안, 하모리해안을 따라 늘어선다.


여러 명의 한라산 자연생태 조사단원들이 생태 조사를 하고 있다. 한라산은 다양한 식생 분포를 이룬 곳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동식물의 보고다. 1966년 10월 천연기념물 제182호 '한라산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마라도가 보이는 전망대

구상나무 군락을 지나면 고산초원이 기다리고 있다. 선작지왓이다. 제주어로 '돌이 서 있는 밭'이라는 뜻이며, 한라산 고원 초원지대 중 영실기암 상부에서 윗세오름에 이르는 곳을 말한다.


봄에는 선작지왓의 털진달래와 산철쭉이 온 초원을 뒤덮고, 가을에는 영실기암의 단풍이 장관을 이룬다. 또 겨울에는 눈 덮인 설원이 한라산 정상과 어우러져 선경(仙景)을 빚어낸다. 털진달래꽃은 다 졌고, 산철쭉의 분홍꽃 바다가 한창이다.

선작지왓 산철쭉

제주조릿대도 초원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다. 백록담을 제외한 한라산 전역에 자라나는 제주조릿대. 땅속줄기가 그물처럼 넓게 뻗어 있고 그 마디마디 부분에서 새순이 나와 고산 습지에서 군락을 이룬다. 이러한 제주조릿대 숲은 강우, 폭설, 강풍 등으로 인한 토양유실을 막아준다. 또 야생동물들의 좋은 서식처가 된다.

선작지왓 제주조릿대

윗세오름이란?


여기서 윗세오름을 정리하고 가자. 윗세오름의 세 봉우리는 각각의 독자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한라산 화구벽 아래 오른쪽부터 남사면에 붉은 흙이 드러나 있는 큰 봉우리가 붉은오름(1740m, 비고 75m)이고, 가운데 길게 가로누운 봉우리가 누운 오름(1711.2 m, 비고 71 m)이다. 가장 왼쪽에 전망대가 있던 곳이 족은 오름인데, 가장 작은 봉우리(1698.9 m, 비고 64 m)라 일명 새끼오름이다. 붉은오름이 윗세오름의 대표 격이다. 그래서 윗세오름을 검색하면 붉은 윗세오름이 소개된다.

윗세오름

족은오름에 올라선다. 선작지왓의 산철쭉과 제주조릿대가 넓은 바다의 잔잔한 물결처럼 바람에 흔들린다. 왼쪽은 장구목오름, 가운데 백록담 화구벽, 그 아래 누운오름, 오른쪽은 윗방애오름방애오름, 그 앞이 붉은오름이다.

족은오름 전망대

누운오름 아래 길가에 연중 물이 흐르는 노루샘이 있다. 시원한 샘물을 한통 가득 채운다. 노루샘 주변은 고원 습지가 형성되어 있어 백리향, 흰그늘용담, 설앵초 등이 자라고 있다.

노루샘

누운오름과 붉은오름 사이로 걸어간다. 그곳에 윗세오름 대피소가 있다. 여기서 어리목코스와 만난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장구목을 거쳐 백록담을 갔다는데 자연휴식년제로 이 길은 폐쇄되었다.


멧돼지에 막힌 길


붉은오름을 오른편에 두고 한라산 정상과 가장 가까운 남벽분기점으로 간다. 넓은 산철쭉 평원이 펼쳐진다. 제주조릿대도 지지 않는다.

붉은오름을 오른쪽에 두고 남벽분기점으로 간다.

백록담 남벽이 가까이 다가온다.

깊은 계곡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른다. 물론 건천이지만 경사는 급하다. 영천의 지류다. 골짜기의 물들이 모여서 돈내코 계곡으로 흘러간다. 멧돼지가 물을 먹던 천의 입구라 돈내코다. 돈내코의 '돈'은 돼지(돝, 돗), '내'는 냇물, '코'는 입구이다. 옛날 이 일대에 멧돼지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돗드르('드르'는 '들판'을 이르는 제주어이다)라고 불렀다.

백록담 남벽과 영천 지류

계곡에 점심 도시락을 먹다가 바윗 틈에 핀 예쁜 꽃을 발견한다. 분홍색 하트 5장을 모은 듯한 작은 꽃이 꽃대 끝에 달려있다. 바로 모야모에 검색한다. 한라산, 가야산, 신불산 등 고산 습기진 곳에 자생하는 설앵초다. 이름 또한 꽃처럼 예쁘다. 눈깨풀, 분취란화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꽃말은 '수줍음'이다.

설앵초

보리수나무에 꽃이 피었다. 종 모양을 한 연 노란 꽃이 아래를 향해 주렁주렁 달렸다. '부부의 사랑'이란 꽃말을 가졌다. 열매가 보리 수확시기와 같은 시기에 열리고, 씨앗이 보리와 닮아 '보리수'라 하였다고 한다. 열매는 붉게 익는다. 이름 또한 꽃처럼 예쁘다.

보리수나무

석가모니의 해탈에 나오는 보리수는 뽕나무과 무화과나무속의 열대성 '인도보리수'이고, 사찰에서 흔히 심는 보리수나무(菩提樹)피나무과의 '보리자나무'이다. 보리수나무과의 보리수나무와는 다른 나무이다.


탐방로는 산철쭉지대, 제주조릿대 군락, 구상나무 군락으로 삼분할된 평원으로 이어진다. 몇 차례 영천 지류를 건넌다.

방애오름

방애오름과 윗방애오름 사이로 지나간다. 앞이 툭 트이고 멀리 서귀포 시가지와 제주 남쪽 바다가 보인다.

전망대에 본 서귀포 시가지

남벽 분기점을 500여 m 남은 지점에서 돌발상황이 벌어진다.


"할아버지, 멧돼지가 있어요. 조심하세요."


엄마, 아빠와 함께 온 예닐곱 살쯤 된 아이가 놀란 목소리로 멧돼지 출몰을 알려준다. 아이의 부모는 멧돼지 때문에 돌아간다고 한다. 지나갈까 망설이는 탐방객은 여남은 명으로 불어났다. 여자들은 '그냥 돌아가자'는 쪽이고, 남자들은 대부분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하며 함께 뭉쳐서 길목을 막고 있는 멧돼지에게 대항해 본다. 몇 번 시도해 보지만 역부족이다. 국립공원 관리소 직원은 '포획을 안 하니 개체수가 불어나 종종 멧돼지가 횡포를 부린다'며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아, 이래서 돈내코구나. 결국 모두 포기하고 윗세오름 대피소로 돌아간다. 돈내코의 유래만 확인한 셈이다.

여기서 까지다. 한라산 남벽을 올려다본다.

한라산 남벽

한라산의 웅장한 자태는 자애로우면서도 강인한 기상을 가슴에 품고 있는 듯하다. 1970년 3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한라산과 아름다운 제주는 「유네스코 자연과학분야 3관왕」이 되었다. '생물권 보전지역',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으로 잇달아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인류의 소중한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살아 백 년, 죽어 백 년 구상나무 숲


남벽 분기점에서 돈내코로 내려가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어리목으로 하산한다. 돈내코코스는 계곡이 좋고 영실코스는 영실 굼부리를 둘러싼 풍광이 절경이다. 구상나무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곳은 단연 어리목 코스다. 멧돼지 덕분에 구상나무를 자세히 살핀다.  

어리목 코스로 하산한다.

구상나무는 1907년 한라산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소나무과 전나무속에 속하는 늘 푸른 나무로 해발 1,000m가 넘는 우리나라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 남부 고산지역에서만 자라는 토종나무다.

구상나무 군락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자라고 있는 곳은 백록담을 중심으로 해발 약 1400m 고지 이상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약 6㎢의 넓은 면적에 구상나무 숲이 있다.


구상나무는 프랑스 신부인 타케와 포리 등이 1900년대 초에 우리나라의 수많은 식물을 채집하여 유럽과 미국에 보낼 때 함께 묻혀 갔다. 원뿔형의 아름다운 수관을 갖췄다. 잎이 부드럽고 향기까지 나서 크리스마스트리, 정원수로 인기가 높다.

구상나무 꽃

멀리서 바라보니 온통 푸르기만 하던 구상나무는 꽃이 한창이다. 구상나무 꽃이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물처럼 달려 있다.


구상나무는 원래부터 따뜻한 곳을 싫어한다. 지구 온난화로 생육고도가 높아져 서식지와 개체수가 급감하고 있다. 이제는 산 꼭대기까지 올라와 더 물러날 곳이 없다. 안타깝게도 멸종위기 식물의 반열에 올랐다. 대부분의 고사목은 구상나무가 남긴 것이다.

살아 백 년 죽어 백 년

이런 구상나무를 제주에서는 '살아 백 년 죽어 백 년'이라고 말한다. 구상나무는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오랫동안 한라산을 아름답게 한다는 뜻이다.


한라산을 오르는 길목, 어리목


산철쭉과 눈향나무가 장관인 초원을 지나 샘터에서 물통을 채우고 사제비동산의 아름다운 숲길을 들어선다. 단조로운 계단 길이 계속된다. 올라오는 사람들은 입에 단내가 난다. 하산하는 우리는 한결 여유가 있다. 단조로운 길이 아니라 자연생태 학습장이다. 새소리가 들린다. 노루가 후다닥 달아난다.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가 하늘을 덮고 있어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서어나무, 때죽나무 등과 서로 사이좋게 자라는 도토리나무 숲이 이어진다.

도토리나무 숲

광령천의 상류인 어리목 계곡을 건넌다. 광령천의 물길은 서귀포로 흐르는 영천과는 반대방향인 제주 북쪽의 외도항으로 흐른다.

어리목 계곡

어리목은 '길목'이란 뜻이다. 버스 정류소를 기준으로 하면 한라산을 가장 빨리 오르는 길이다. 휴게소의 규모도 다르다. 어리목 탐방 안내소 뒤편에 어승생 오름이 있다. 어승생 오를 날을 기약한다. (2023. 6. 4)

어리목 휴게소

운동 시간 4시간 44분(총 시간 7시간 1분)

걸은 거리 16.3km

걸음 수 28,715

소모열량 2,046kcal

평균 속도 3.4k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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