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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Aug 06. 2023

여기까지는 '항쟁'이다.

제주 4.3 평화기념관(1)

김 선생 댈러스로 돌아왔습니까? 친구 집이 미국 남부라면 쿠바 여행도 한번 생각해 볼만 한데. 우리나라에서는 가기 쉽지 않은 곳이 잖아요.


80년대 중반, 금서가 풀리면서 마스터 인쇄기로 대표되는 인쇄 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사회과학 서적 출판 붐이 일었지요. 일어판 사회주의권의 책들이 번역되어 발간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히 팍스 아메리카에 저항하던 쿠바, 리비아나 죽의 장막이라 불리던 중국에 대한 관심이 쏠렸었지요. 그때도 우리나라 제주에서 있었던 4.3은 발표되자마자 금서가 된 순이삼촌과 일본에서 화제가 된 화산도 등의 소설 몇 편 외는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냉전과 분단의 광풍에 휘말려 수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4·3의 진실을 언제까지나 틀어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순이삼촌이 금기의 4.3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계기가 되었고, 유족을 비롯한 사회 각 층의 끈질긴 노력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2003년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는 4·3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하였습니다. 55년간의 침묵을 깨고 2008년 3월, 제주 4.3 평화기념관을 개관하였고요. 4.3 평화기념관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 편지에 기념관의 전시물을 그대로 옮깁니다. 사진을 편집하여 붙이고 기록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역사의 동굴(프롤로그)


제주의 마을 사람들이 폭력을 피해 숨어들었던 동굴,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던 동굴, 그렇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립의 동굴, 죽음의 동굴에서 4.3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어두운 동굴에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내리고 그곳에 백비가 누워있습니다.


백비. 사전적 의미로 '깨끗한 비석'입니다. 비석에 글을 새기지 못하고 있을까?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 온 '제주 4.3'. 민주 정부가 세 차례나 들어서고, 대통령이 사과하고, 4·3 희생자들에게 실질적인 피해 보상을 해주는 4·3 특별법 개정안 시행령이 발효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3 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란 이름표를 단 안내문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쓰여 있습니다.

백비

흔들리는 섬(해방과 좌절)


일제는 2차 대전 말 일본 본토가 미군에게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제주도를 본토방어 결전지로 삼는데요. 해안가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비행장도 건설합니다. 섬 전체가 일본군 요새로 전락하고 일본군 7만 명이 배치됩니다. 제주 사람들은 강제 노역과 공출엄청난 고초를 겪게 되지요.

아시다시피 일제는 미국의 원폭투하, 소련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자, 1945. 8. 15 무조건 항복하지요. 우리 민족은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국으로 나갔던 동포들도 귀향합니다. 전쟁터와 홋카이도, 사할린 탄광지대 등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제주도민 6만여 명이 돌아와서 제주사회는 귀향민으로 들썩거렸습니다.


건국운동이 전국적으로 빠르게 퍼져 나갑니다. 제주도민들 역시 자주독립국가를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바람과는 달리 미군정이 시작되었고요.  미군정은 계획된 것인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일제강점기 식민지 총독부 경찰 및 관리를 지낸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여 통치를 하게 됩니다. 한편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아래 3.8선 이남과 이북이 각기 따로 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흐르고.


바람 타는 섬


1947. 3.1은 제주현대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되는 날입니다. 이날 관덕정 뒤편의 제주북국민학교 교정에서 3.1절 기념대회가 열렸지요. 대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통일독립을 원하던 제주도민들은 오후 2시 집회가 끝나자 통일독립촉구 가두시위에 나섭니다.


여기서 구경 나온 어린이가 집회를 통제하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어 다치는 일이 생깁니다. 다친 아이를 내버려 두고 가는 기마경찰에 화난 군중들이 격렬히 항의합니다. 군중의 분노에 겁먹은 기마경찰은 경찰서로 달아납니다. 주변 사람들은 따라가며 돌을 던집니다.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군정경찰이 군중을 향해 방아쇠를 당깁니다.

군정경찰의 총탄에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총상을 입는 3.1 발포사건이 발생합니다. 사망자는 시위를 구경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는 제주북국민학교 5학년 어린이와 젖먹이를 업고 있던 21세의 여인도 포함되어 있었고요.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고 관람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박경훈 도지사, 독립신보 1947.4. 5자)


군중의 항의에 대해 과도한 대응을 한 군정경찰은 발포사건의 수습책으로 오히려 3.1절 집회 주최 측 인사들을 잡아들입니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제주사회의 민심은 들끓기 시작합니다.


경찰 발포에 제주도민은 민ㆍ관 합동 3.10 총파업으로 항의하기에 이르고, 심지어 경찰관 66명도 파업에 동참합니다. 제주도청 공무원들도 "발포 책임자 및 발포 경관 처벌, 3.1 사건에 관련한 애국적 인사를 검속 하지 말 것, 경찰의 무장과 고문 즉시 폐지, 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 보장' 등 6개 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을 합니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로 단정합니다.

총을 맞은 사람이 시위군중이 아니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항의시위에 발포로 과잉대응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태가 악화되자 미군정은 현지 조사단(단장 카스티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합니다. 미군 조사단은 파업원인을 '경찰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되었고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미군 보고서 1947. 3. 14)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다'(한성일보 1947. 3. 13 자) 말하며 탄압을 향해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응원경찰을 급파하여 검거를 시작합니다.

미군정 조사단이 제주를 떠난 다음날인 3월 14일 조병옥 경무부장이 응원경찰 421명과 함께 급히 제주로 내려와 15일 파업 주모자 검거 명령을 내립니다. 이틀 새 200명이 연행되고 고문이 시작됩니다. 파업 참가한 대부분의 경찰관은 면직되고 서북청년단으로 교체되었습니다. 파업은 여기서 일단락되고 파업에 참가했던 공무원들은 대부분 집무에 복귀하였습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병옥의 3.1절 소요 및 관공서 파업 사건 진상 발표)


서북청년단이 들어옵니다.

1947년에 발생한 '3.1 사건'으로 전격 사임한 제주출신 박경훈 초대 제주지사 후임으로 임명된 유해진 제주도지사는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이하 서청)을 몰고 들어와 1948년 초에는 760명에 달했습니다.


서북청년회란 북한에서 월남한 일부 세력이 1946년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청년단체입니다. 미군정은 극우 성향을 가진 서청을 이용합니다. 미군정책에 반대하는 지역에 투입합니다. 봉급도 없이 경찰 보조요원으로 기용하였습니다.

서청은 순식간에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붉은 섬'으로 낙인찍힌 제주 섬에서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와 갈취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지요.


"서북청년단이 갑자기 들이닥쳐 닥치는 대로 잡아갔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서청은 4.3 사건 발발의 한 요인이 됩니다.  미군 감찰관은 유 지사를 "반대파를 다루는데 무자비하고 독단적"이라고 보고했지만, 딘 군정장관은 계속 그를 신임합니다.


검거선풍으로 유치장이 넘칩니다.

미군 감찰단은 '수감자들이 유치장이 비좁아 앉지도 못하고 서서 수감생활을 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약 3.3평의 한 방에 35명이 수감됐다'라고 보고합니다. (제주 유치장에 관한 미군 감찰 보고서 1948. 3. 11)

검거 선풍으로 유치장이 넘쳤다 <강요배 그림>

중문 발포사건, 종달리 6.6 사건, 북촌 발포사건과 1948년의 2.7 사건 등 민중과 경찰의 충돌이 잦아지면서 검속자는 계속 늘어났습다. 보고서는 3.1절 발포사건 이후 4.3 봉기 직전까지 검거된 사람이 1년간 2천5백 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주도의 여론은 만일 경찰이 빠른 시일 내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모든 조직들이 제주경찰감찰청을 공격하리라 한다."(제주도 여론에 관한 미군 ClC 보고서 1947. 12. 13)



무장봉기의 깃발이 오릅니다.

"탄압이면 항쟁한다",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


1948. 4. 3 새벽 2시를 기해  제주도 전역에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습격하였습니다. 전단을 통해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며, 남한만의 5.10 총선을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무장봉기 직후 상황

미군정의 지휘 아래 군경은 토벌에 나섭니다.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 제9연대는 4.3 항쟁을 진압하는 군경 토벌대의 핵심 역할을 합니다. 제주도 내 장정들을 모병하여 창설한 향토연대인 제9연대는 무장대에 대한 강경 진압을 반대하고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합니다. 김익렬 연대장이 김달삼 무장대 사령관과 평화 협상을 하여 합의를 이끌어냅니다.

김익렬 연대장(오른쪽)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은 평화협상에 합의한다.

미 군정과 강경파 경찰들에 의해, 김익렬 제9연대장김달삼 무장대 사령관의 합의는 무산됩니다.

전투중지 사흘만인 5월 1일 백주대낮에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납니다. 평화협상에 대한 불만으로 제주읍 오라리에 들이닥친 괴청년들이  민가에 불을 질렀습니다. 경찰은 "폭도(무장대)의 소행"이라고 몰고 갔으나,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조사를 벌인 끝에 우익청년단원들이 저지른 방화임을 밝혀내고 주동자를 체포하여 구금하고 평화협상을 유지하려 합니다.

미군 방첩대(CIC)는 김익렬 연대장의 보고를 묵살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군은 '제주도 메이데이'라는 무성영화를 만들어 마치 '오라리 방화 사건'을 무장대가 저지른 것처럼 여론몰이에 나섭니다.


미군정은 경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평화협상은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5.10 선거를 앞둔 미군정의 조급함이 평화적 해결 대신 무력에 의한 진압작전을 택한 것으로 진상조사단은 보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동안 경찰 위주의 진압작전이 경비대에게 넘겨졌습니다.


5월 6일 김익렬 연대장은 경질되고, 후임으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은 미 군정의 방침에 따라 강경한 진압에 나섭니다. 1948년 5월 20일 강경 진압책에 반발한 9 연대 병사들이 무더기로 입산하여 한라산 무장대에 합류합니다. 강경진압은 무장대의 병력을 보강하고 사기를 올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 군정은 이 사건 이후 더욱 강력한 토벌 작전을 전개합니다. 한편 (향토연대인) 제9연대를 불신합니다. 사상적으로도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육지에서 창설된 제11연대가 들어옵니다. 6월 1일 제9연대는 제11연대에 배속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이어 6월 18일 박진경 연대장은 부하의 총에 암살됩니다.

박진경 연대장 피살

제주, 5.10 선거를 거부합니다.

5.10 선거를 둘러싼 상황 인식은 각 정파 간에 간격이 컸습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했으나, 좌익은 물론 김구, 김규식 등의 우익과 중도파들은 통일정부를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하였습니다.  '남북 분단은 전쟁을 불러올 것이다'라고 인식하였던 것이지요.  


"우리의 자주독립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어찌 개인이나 자기 집단의 사리사욕을 탐하여 민족의 백년대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재물을 탐내며 영예를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국 군정 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협력하지 않겠다."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1948. 2. 10>


이승만은 그 유명한 정읍발언을 통해 철저한 반공주의와 '단독정부수립 운동' 등 자신의 정치성향을 드러냅니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 1946. 6. 3>

선거일이 다가오자, 제주도의 무장봉기 전에도 전국 곳곳에서 5.10 선거와 관련된 무력충돌이 벌어졌습니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인사와 중도 민족주의자들까지 선거를 반대하는 가운데 제주도에서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내건 무장봉기가 벌어지자 미군정은 크게 긴장했습니다.


제주도민은 선거날 산에 오릅니다.

무장대는 5.10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선거 당일 마을에서는 경찰가족이나 우익청년단 간부, 선거관리위원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주민들은 산이나 숲에서 머물다 선거가 끝난 후에야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남제주군 2개 선거구 투표율 과반수 미달로 무효화되고, 딘 군정장관은 제주도 재선거을 명령합니다.


여기까지는 '항쟁'입니다. 


항쟁 주체인 무장대의 실체는 부풀려지고 왜곡되었습니다. 병력도 빈약하고 무기도 조악하였습니다. 하지만 토벌대는 강경진압을 합리화하기 위해 무장대 숫자를 과장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건에는 유언비어를 날조합니다.

무장대는 남한 각지에서 모집한 백정이다.
중국 팔로군 출신이다.


미군정과 언론은 악의적인 허위 사실을 퍼트리며 '서북청년단'의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심지어 딘 군정청장은 '무장대는 북한 공산군'이라고 언론에 사태를 왜곡하여 발언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프레임 전쟁'을 통해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여론전을 펼칩니다.


김 선생, 나는 여기까지의 4.3은 항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후에 일어나는 믿기 어려운 국가폭력은 다음번 소식에서 이야기할까 합니다. 남은 여행 일정도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2023.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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