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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Aug 15. 2023

여기부터는 학살이다.

제주4.3평화기념관(2)


불타는 섬


제주도에서는 5.10 선거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합니다. 3개의 선거구 중 남제주군 선거구에서만 1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고,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효화됩니다. 

선거가 끝난 후 산에서 내려오는 주민들

미군정은 5.10 선거 거부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80년 광주항쟁 때 시민군에 밀려 계엄군이 퇴각한 후 미 제7함대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부산항에 입항했듯이, 미군 구축함 크레이그호를 급파하여 제주해안을 봉쇄합니다. 그리고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군 6사단 제20연대 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총사령관으로 파견해 모든 작전을 지휘 통솔하도록 하는 등 총력전에 나섰습니다.

5.10선거가 무산된 직후 제주해안에 급파된 미군 구축함 '크레이그' 호

제주 총사령관에 임명된 브라운 대령은 "사태의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I'm not interested in the cause of the uprising. My mission is to crack down only.), 2주일이면 평정될 것"이라 장담하며 무장대 토벌작전을 진두지휘합니다. 미군정은 중학생까지 포함한 6주간 6천 명을 체포하는 무차별 검거작전으로 강경 대응을 합니다.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제주섬은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습니다.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강경 진압책에 반발한 9 연대 병사들이 무더기로 입산하고 미 군정은 더욱 강력한 토벌 작전을 전개합니다. 이는 박진경 연대장의 암살로 이어집니다. 결국 딘 군정장관은 6. 23 재선거마저 무기한 연기합니다. 제주도는 유일한 선거거부지역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제주도 재선거를 무기한 연기한다는 미군정 장관의 행정명령

당시의 상황에 대해 뉴욕타임스(2001년 10월 24일)는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선거가 보이콧되자 남한에 있던 미군 사령관들이 분개했고 (중략), 섬 주민들을 청소하는 작전(a campaingn to cleanse)을 착수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미군 사령관 분개, 청소작전 착수

이러는 사이 남과 북은 각각 다른 정부를 수립하여 3.8선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완고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대통령이  후, 자신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는 단정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대상으로 제주도를 지목합니다. 80년 신군부가 광주를 지목했듯이. 무장봉기를 주도한 김달삼이 북한으로 감에 따라 제주도는 한층 더 가혹한 진압정책 앞에 놓이게 됩니다.

남과 북은 각각 다른 정부를 수립한다.

여기부터 4.3은 '학살'이다.

토벌대는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중산간마을에 들이닥쳐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가림 없이 무차별 학살하는 '초토화작전을 감행합니다.


학살극은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1948년 10월 17일 '정부의 최고 지령'에 따라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지점에 있는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하면서 예고되었던 것입니다.

9연대장 송요찬의 포고령과 9연대의 대량학살 계획을 기록한 미군 보고서

1948. 11.17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초토화 작전을 뒷받침합니다.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령으로 선포한 계엄령은 '불법 계엄령'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계엄령 선포에 관한 국무회의 의결서

이승만 대통령은 4.3 사건을 "가혹하게 탄압하라"라고 명령합니다.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본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이승만 대통령의 명령, 국무회의록 1949. 1. 21>


뿐만 아니라,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를 신설했고,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시켰습니다.

이승만은 '4.3을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한다.

표적은 중산간마을이었습니다.

9 연대는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에 협조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중산간마을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습니다.


미군 비밀보고서는 이 작전에 대해  "제9연대는 모든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공공연하게 게릴라에게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집단학살계획을 채택했다. 섬 주인들에 대한 대부분의 살상이 제9연대가 점령했던 1948년 12월까지의 기간 동안  발생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9연대의 대량학살계획에 대해 기록한 미군 보고서 1949. 4. 1>

토벌대는 여순사건을 진압한 2연대로 교체된다.

1948년 12월 말, 경비대 총사령부는 대전 주둔 제2연대와 제주 주둔 제9연대를 맞교대시켰는데요. 제9연대장 송요찬과 마찬가지로 제2연대장 함병선도 일본군 지원병 준위 출신이었습니다. 제2연대는 여순사건을 진압한 전투 경험이 있는 부대였고, 특히 제3대대는 서북청년회 출신으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무장대로 가장한 제2연대 대원들

"폭도지역에선 모든 사람을 사살하라"

함병선 연대장은 1948년 12월 말부터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창설된 그해 3월 전까지 실질적인 진압 책임자였습니다. 미군 비밀문서는 "함병선은 신분이나 무기 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severe tactics)을 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때 '북촌 사건'이 발생했고, 봉개리 주민들이 집단 학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초토화작전은 미군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던 것일까요?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미군 제59군정중대 본부

미군은 미군정시절에 진압작전을 직접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수립 후에도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임시군사고문단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미군 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1948년 9월 2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에게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미군에게 있다. 군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군 고문관을 거쳐야 한다" 한미협정의 내용을 상기시켰습니다.


불바다 된 중산간마을

토벌대가 저지른 방화로 유서 깊은 중산간마을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버렸습니다. 가옥 2만여 호 4만여 동이 소실되는 등 중산간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산간에 남아있던 주민들이 집단으로 희생됩니다.

폐허가 된 중산간 마을

믿기지 않는 증언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읽기조차 힘들었습니다. 몇 가지만 옮겨 봅니다.

서청 출신의 삼양지서 주임은 "하루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학살을 일삼던 제9연대 정보과장은 매일 모르핀을 맞아야 하는 마약중독자였다. 당시는 이런 자들이 제주도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서귀포경찰서장을 역임했던 김호겸은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행위에 대해 "서청은 무고한 주민들을 죽인 후, 보고서에는 현장 답사 차 갔는데 도주, 정지명령에도 불구 계속 도주, 불가피하게 발사, 명중, 사망이라고 썼다"라고 증언했다.
1949년 1월 3일 무장대 복장으로 위장한 경찰이 제주읍 도평리에 들이닥쳤다. 경찰은 "우린 산사람이다 우리에게 협조하고 식량을 제공하라"라고 말했다. 일부 주민들이 그들의 정체를 알아채고 저항했지만 경찰은 주민들을 함정 학살했다.
학살 직전의 끌려온 주민들


학살 피해 한라산으로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해변마을로 소개되었던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토벌대의 학살극이 그치지 않자 다시 한라산으로 피신합니다. 무장대와 일반 주민을 분리시킬 목적이었던 소개령은 토벌대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주민들을 눈 덮인 한라산으로 쫓아내고 맙니다.

억새와 소나무 가지로 엮은 피난민 거처

토벌대의 총부리에서는 벗어났지만 피난생활은 너무나 처절했습니다. 겨울철 한라산에는 살을 에는 추위만 있을 뿐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웠고요. 많은 피난민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습니다.


피난민은 백기 들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를 창설하였습니다. 이 전투사령부는 제2연대와 유격대대 그리고 제주경찰과 새로 증파된 경찰특별부대를 통합 지휘하는 부대였습니다. 이처럼 전투력을 강화한 까닭은 1년 전 무효화된 선거를 재실시하는 문제와 미국 원조에 관한 대통령의 초조감 때문이었습니다.

1949. 3월 말 토벌군은 "귀순하면 살려주겠다"며 선무공작을 폈습니다. 이 말을 믿고 피난민들은 나뭇가지에 흰옷을 매어 만든 백기를 들고 하산합니다.


산에서 내려온 주민들 가운데 일부 노약자들은 곧 풀려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주정공장 등 수용소에 수개월 동안 감금된 채 철저히 심문을 받습니다. 그 사이 오랜 피난생활의 후유증으로 병들어 죽기도 했고 이 비참한 집단수용소에서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학살극은 끝난 줄 알았건만 ㆍㆍㆍ

"하산하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생명을 보장해 주겠다'라고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선무공작을 주도했던 유재흥 대령이 제주도를 떠난 후 제2연대장 함병선은 하산한 주민들을 1949년 6~7월 군법회의에 넘겼습니다. 이 군법회의는 법이 정한 최소한의 절차도 거치지 않은 불법적인 것이었고요.

하산민을 집단 수용한 주정공장

군법회의에서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 사형, 무기형,15년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여성들도 남편이나 아들이 사라졌다면 도피자 가족'이 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1,660명의 주민이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져 감금되었습니다.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인 수용자들

1949년 6월 7일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경찰에게 사살됩니다. 무장대는 이미 와해된 상태였지만, 이덕구는 무장대의 상징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컸습니다. 경찰은 제주읍 중심지인 관덕정 옆에 이덕구 사체를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구경하도록 했습니다.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사살로 토벌작전은 공식적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집단학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경은 입산자와 입산자 가족들을 예비검속으로 잡아가 무참히 학살합니다. 형무소에 수감된 2,500여 명의 수감자 대부분은 1950년 7월경 집단학살됩니다.

예비검속을 공표하지 말것을 지시하는 국무회의록

예비검속이란 범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전에 구금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탄압하기 위해 '예비검속법'을 만들었지만, 이 법은 해방 후인 1945년 10월 9일 미군정법령 제11호에 의해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불법적인 예비검속을 대대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비검속을 공표하지 말라"라고 지시합니다.

집단학살된 수감자와 예비검속자들


제주공동체는 황폐화됩니다.

4.3은 제주도에 엄청난 피해를 안깁니다. 제주도민의 1/10인 2만 5천 명 내지 3만 명이 희생됩니다. 희생자의 33%가 노약자와 여성이었습니다. 혹자는 4.3 항쟁이라고 정의하지만, 350여 명의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민간인 2,3만 명이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이는 '민간인 학살'입니다.


집단학살 속에도 의로운 바람은 있었습니다.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추진한 김익렬 연대장, 예비검속자 학살을 거부한 문형순 경찰서장, 고문치사 사건을 밝힌 의사, 대량학살을 몸으로 막은 순경 등 진흙 속에 피어난 연꽃 같은 의인들있었습니다.


김 선생, 가슴 한편이 아려 와서 자료를 정리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자극적인 내용은 그대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글에 사용한 사진은 4.3 평화기념관의 전시자료를 직접 촬영하여 편집한 것입니다.


전시물에는 무장대의 양민학살과 약탈행위에 대한 내용있었습니다. 토벌대의 학살 이야기만 언급하였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토벌대가 벌인 행위를 그냥 양비론으로 치부하기에는 정도를 한참 넘은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끈질긴 진상규명활동과 4.3을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의 정신으로 승화시키려는 각계각층의 노력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2023.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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