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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Aug 22. 2023

어둠에서 빚으로

제주4.3평화기념관(3)


흐르는 섬(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


김 선생 이제 4.3 평화 기념관의 마지막 전시실로 옮겨갑니다. 이 모든 일이 이 땅에 함께 사는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엘리트 세력의 오만과 탐욕에서 일어났다고 하기에는 그 후유증이 너무 컸습니다.


더미로 변해버린 마을

4.3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제주마을공동체를 해체해 버렸습니다.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소개하면서 마을에 불을 질러 9천여 동의 가옥이 잿더미로 변했고, 9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어 마을 복구와 난민정착사업이 시행되었으나, 곤을동, 어우눌, 리생이 등 109곳의 마을은 원주민이 끝내 복귀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았습니다.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몸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

당시 제주도 인구의 1/10인 2만 5천 ~ 3만 명의 민간인이 집단으로 희생되었고, 희생자 33%가 노약자와 여성이었습니다.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도 육체적, 정신적 피해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분의 사연만 옮겨 적습니다. 무명천 할머니의 삶은 따로 만나볼까 합니다.

몸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

"여덟 살 때였습니다. 군인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갔습니다. 저는 산으로 피신하다가 절벽에서 떨어집니다. 그 후 군인들에게 붙잡혀 심하게 매를 맞고, 추락 후유증으로 팔다리가 마비되었습니다."  김순덕(여 , 1940년생, 제주시 봉개동)


"옷을 다 벗긴 상태에서 얼굴을 치마로 둘러 씌우고, 경찰 둘이서 장작으로 마구 때립디다. 오른쪽 허벅지 뼈가 틀어진 것은 무릎 꿇어앉으라고 한 후에 군홧발로 밟아버려서 그런 겁니다. 잡혀간 날 저녁부터 꼭 이틀 동안 맞았습니다." 고산월(여, 1934년생, 안덕면 상천리)


레드 콤플렉스

4.3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제주 사회, 나아가 한국 사회의 전반에 반공이데올로기는 더욱 공고화되었지요. 4.3 희생자 유가족들은 '빨갱이 새끼', '폭도새끼'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숨 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 대해  빨간색을 덧씌우며 무조건적 반감을 가지는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것이 아마 이때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요즘은 소위 '좌빨'로 조롱하는 정도의 말로 생각하지만, 당시 그에 대한 공포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연좌제의 희생양이 되어 레드 콤플렉스시달리는 제주의 청년들에게 한국전쟁은 피신처이기도 했습니다. 가족에게 씌워진 '빨갱이'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해, 모슬포에 있던 해병대에 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작전에 투입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삼촌, 형, 이웃 사람예비검속으로 끌고 가 섯알오름에서 학살한 그 해병대에 입대하여 전장에 나간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고 죽이는 또 다른 광풍에 휘말립니다.

섯알오름 학살터에 세워진 총살집행자 진술문

간첩으로 조작됩니다.

일제강점기에, 4.3의 광풍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생인 재일교포를 만난 게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으로, 일본에 사는 어머니를 만난 게 반공법 위반 사건으로, 일본에 사는 아버지를 찾은 게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조작되어 처벌을 받고 빨갱이로 매장됩니다. 훗날 재심청구소송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지만 잃어버린 인생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진상규명운동은 피나는 기억투쟁이었습니다.

4ㆍ3은 제주공동체에 엄청난 상흔을 남기고, 육체적ㆍ정신적 후유증을 앓게 합니다. 이에 대한 치유는 물론이고, 왜곡되고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첫 단계인 진상규명조차 강요된 침묵으로 그 의지를 억누릅니다.


1960년 4월 혁명 직후 시작된 진상규명운동은 이듬해 5.16 군사 쿠데된서리를 맞습니다.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아무도 말 못 하던 엄혹한 시절인 1978년 현기영은 중편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하여 4.3 논의의 물꼬를 틉니다. 반세기 가까이 이념적 누명을 쓰고 지하에 갇혔던 4.3이 공론의 장으로 올라옵니다. 필화사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1987년 민주화운동의 열기 속에 4.3의 진실 찾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국민의정부가 들어서자, 2000년 1월 12일  4.3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고,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을  시작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4.3특별법 제정 기념 서명, 2000.1.11

2003년 10월 15일 국가 공권력의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고,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하고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합니다. 국가 차원의 첫 사과입니다.

제주 4.3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

"4.3의 민간인 희생은 국가권력의 잘 못"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를 듣고, 마음대로 울지도 못했던 4.3 희생자 유가족들은 텔레비전 앞에서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합니다.


정부는 2005년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선포하고, 2014년 '4.3 희생자 추념일'을 법정기념일로 공식 선포합니다. 이제 4.3은 제주도민만이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지역의 역사가 아닙니다. 법정기념일 지정은 4.3을 분단과 냉전의 모순 속에서 일어난 국가폭력의 불행한 사건으로 전 국민이 인식하고 기념하는 역사로 공인한 것입니다.

2014년 (박근혜 정부), 정부 주관으로 열린 첫  '4.3희생자추념식'. <사진 출처 : 제주4.3추가진상보고서>

그리고 2021년 3월 23일 '4.3 특별법'을 개정하여 희생자 명예회복과 유족의 아픔 치유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문재인 대통령 4.3특별법 전부개정 기념 법령집 서명, 2021.4.3

하지만  가해자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해진 적이 없습니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조차도 명확히 한 바 없습니다. 진상조사는 진상규명과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회복에 역점을 두었고, 4.3의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는 후세 역사가의 몫으로 미루었습니다.


평화의 섬(에필로그)

4.3 희생자 영정

전시실을 나오는 마지막 통로에는 희생자의 영정이 양쪽 벽면과 천장의 삼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습니다. 이 길을 걸어 나옵니다. 아직 젖살이 포동포동한 아이도 그 속에 있습니다.


"희생자를 잊지 말자. 해방공간의 역사를 잊지 말자. 가해세력의 만행을 잊지 말자. 기억을 지우려는 세력이 지금도 현란한 혓바닥을 놀리고 있다. 기억과의 전쟁이다. 기록을 남기자."라고 다짐하며 나옵니다.

영정 속의 아이들

관람을 마치고 전시실을 나서니 두 개의 조형물이 관람객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해원의 폭낭'은 원통한 마음을 푸는 소통의 공간입니다. 4.3의 아픔을 기억하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축원문이 주렁주렁 걸려 있습니다.

'해원의 폭낭'과 '평화'

자유로움의 상징인 새의 날개와 대지를 의미하는 구가 조화를 이루어 평화의 의미를 새긴 임춘배 작가의 조형물 '평화'가 무거웠던 마음을 다소간 풀어줍니다.


제주 4.3은 평화ㆍ통일ㆍ인권의 상징입니다.

4.3의 아픔을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의 미래가치로 승화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2003년 애월읍 하귀리는 영모원 위령단을 건립해 애국열사, 호국영령, 4.3 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세웠습니다.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비문을 통해 화해와 통합을 시도한 것입니다. 4.3 유족회와 제주 경우회도 화해를 선언했습니다.

김 선생 작년 가을 제주의 억새풀은 크기도 풍성하기도 예년만 못했습니다. 한데 평화공원의 억새풀은 석양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속절없이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의 모습이 억울하게 가신 영혼들을 위로하는 살풀이 춤을 추는 듯했습니다.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4.3을 절대 잊지 말자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하여 4.3의 아픔을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의 미래가치로 승화하자고. (2023.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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