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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Sep 04. 2023

여름밤의 천지연폭포

밤마실 나가기 좋은 곳


지난달부터 시작한 장마가 그칠 줄 모른다. 열대지방의 우기처럼 스콜성 소나기가 안 오는 날이 없을 정도로 자주 내린다. 습기를 머금은 후덥지근한 열대야도 연일 맹위를 떨친다. 여름에 올레를 걷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중산간 숲 속으로 산책길을 바꿔 본다. 하지만 비가 자주 내리니 일일 만보 걷기의 약속은 실천하기 어렵다. 비가 내려도 안전하게, 더위에도 시원하게 걸을 수 있는 천지연폭포를 찾았다. 남성마을 입구에서 서귀포칠십리시공원을 거쳐 천지연폭포로 들어간다. 약 2km 거리다.

해질녘 노을이 연외천에 비친다. 켄트지 위에 그림물감을 두껍게 떨어뜨리고 반으로 접어 찍어낸 데칼코마니처럼 물 위에  대칭적 무늬를 만든다. 기암절벽의 울창한 난대림 계곡을 타고 시원한 바람이불어온다. 에어컨 바람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야외공연장에서 관현악 공연을 하고 있다. 폭포수를 타고 서귀포칠십리시공원으로 올라가는 연주 소리를 듣는 것으로 쌓인 피로를 푼다. 아내는 에 앉아 연주를 감상하고 나는 맨 뒤에서 감상하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헝가리 무곡'이면 어떻고 '테스형'이면 어떤가. 여름밤에 마실나와 음악을 듣는 것이 어딘데.

담팔수, 솔잎란과 백량금 등 희귀 식물 자생지라는 안내판을 읽기 쉽지 않은 밤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걷는다. 계곡에 발달한 상록활엽수림의 우점종이 구실잣밤나무인지 산유자나무인지 관심을 내려놓는다. 조명을 밝혔다고 하지만 수종까지 구별할 정도는 아니기에 더 운치가 있다.

연외천에 서식하는 청둥오리, 원앙새, 무태장어는 잠 자러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서귀포 지역에 용천수와 폭포가 많은 이유를 꼭 알아야 되겠나. 밤마실 나와서까지. 서귀포층이니 탄산염암이니 지하수체니, 이 모두 다음에 공부하자. 오늘은 이대로가 좋다.

두 줄기 폭포수가 힘차게 떨어진다. 후쿠시마 핵폐기물 방류 지지, 해병대 수사관 사법처리, 공교육 정상화 요구 탄압,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 고속도로 노선변경, 8.15경축사 논란 등의 소음에 갑갑하다.   폭포의 물줄기가 답답하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무더위와 스트레스로 시달리는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

폭포를 바라보며 외국인 남녀가 안고 있다. 서양인의 애정 표현은 자연스럽고, 과감하다. 유모차를 타고 온 아이가 '와아'하며 탄성을 지른다. 여기저기서 휴대폰을 내민다. 일가족이 물가에 앉아 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다. 이 모두 자연의 일부다.

다시 새연교까지 갔다가 버스 종점으로 돌아온다. 부라보콘 하나 먹으면서. 만보는 가뿐하게 채운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날 밤마실 나가기에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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