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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Sep 15. 2023

육지 것들

중문동 둘러보기 1

보통 자기가 사는 동네는 잘 돌아보지 않는다. 부산 사람이 해운대를 잘 안 가듯이. 그동안  멀리만 다녔는데 오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중문동을 돌아볼 생각이다. 중문동 둘러보기는 중심지인 오일장에서 시작한다. 오일장 앞에 제주의 정서를 드러내는 특이한 이름의 음식점이 있다.


중문 포차,'육(肉)지 것들'


제주 토박이들은 외지 사람들을 '육지 것들'이라고 말한다. 특히 세상살이 경험이 많은 노인들이 자주 쓰는 말이다. 자신들은 '섬 것들'이라고 한다. 그냥 사람들의 무리를 '~것들'이라 부르는 것이 곱게 들리지 않는다. 육지 사람을 비하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한데 자세히 들어보면 '육지 것들'의 범주는 반드시 육지 사람 국한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섬이냐 육지냐가 아니라 제주 밖의 외지 사람이란 말에 가깝다.


중문 포차,'육(肉)지 것들'에 들어서면 벽면에 낙서가 가득 적혀 있다. 그중 '육지 것들'을 정의한 글이 눈길을 끈다. 섬사람들의 외지인들에 대한 복잡 미묘한 함의를 지닌  '육지 것들'이란 말을 간단하게 정리해 놓았다.  


조상 대대로 제주에 살았다고 하더라도 제주의 자연을 그의 돈벌이로만 여기는 사람은 '육지 것'이며, 비록 어제부터 제주에서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제주를 그의 생명처럼 아낀다면 그는 제주인이다.


탐라국이 고려에 복속된 이후 고려, 몽골, 삼별초, 조선, 일제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방 제주섬은 외지인의 수탈 대상이었다. 섬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몽골인이건, 고려인이건, 조선인이건, 또 일제건, 미군정이건 다를 바 없다. 모두 '육지 것들'일뿐이다. 토착 제주 사람들은 주인 행세는 고사하고, '목호의 난' 때는 몽골 잔당에 동화된 '오랑캐'로, 4·3 때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빨갱이'로 매도되어 중앙 정치권력의 토벌 대상이었다.


제주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주 사람들이 외지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경계심을 이해할만하다. 중문동 역시 피눈물 나는 과거를 안고 있는 마을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곳(옛 중문리)은 4·3 당시 중문면사무소(현 중문우체국)와 중문지서가 자리 잡고 있어서 중문면의 중심마을이었고, 토벌대의 근거지였다.

중문우체국(옛 중문면사무소)

3·1 발포사건 후, 당시 중문지서 경찰관 5명 전원은 직원회의를 거쳐 3·10 총파업에 참가한다. 이후인 3월 15일과 17일, 중문지서 앞에서 두 차례에 걸쳐 3천여 명의 중문 주민들이 마을지도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연다. 대체된 응원경찰은 무차별적인 총격으로 응수한다.


4·3이 발발하자 중문지서는  중문면 관내 토벌대의 총본부 역할을 했다. 그러니 무장대의 표적이 되었다. 1948년 11월 5일 무장대는 토벌대가 주둔하던 중문지서와 면사무소를 습격한다. 토벌대 군인들은 불타버린 면사무소 터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공개적인 보복 학살을 자행하였다. 9연대를 탈영하여 입산한 무장대원의 어머니와 여동생도 여기에서 총살되었다. 우체국 정문 앞 왼쪽에 남아있는 면사무소로 가던 계단과 세 그루의 소나무가 보복 학살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이 사건 후부터 군부대(2연대 1대대 4중대 4소대)중문초등학교에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대장은 전부일, 중대장은 남백봉, 소대장은 서봉호였다.

중문초등학교

중문초등학교 동쪽 밭 버리왓(서귀포시 천제연로 239번지)상예리 주민들이 학살된 장소다. 토벌대가 학생들을 불러내어 학살 장면을 강제로 목격하게 했다는 증언이 있어 충격을 준다. 4·3 당시 중문초등학교 학생이었던 원응두씨는 목격했던 학살 장면을 이렇게 말한다.


“토벌대는 학교 옆 버리왓에서 산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총살할 때 우리를 모두 학교 밖으로 나오게 해 구경시켰어요. 토벌대는 총살한 사람들의 목목을 베어 전신주 위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워낙 난리통이어서 우리는 그냥 무덤덤했습니다.


유적지 안내문이 있는가 하여 찾아 보지만, 지금은 주공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어 그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버리왓에서 불과 200여m 떨어진 지점에 이런 것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치욕의 역사를 증명하는 가증스런 비석

타버린 중문중학원을 새로 짓는데 건축자재를 지원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주민무자비하게 학살한)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와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치욕의 역사를 증명하는 가증스런 비석이다. 그 동안 학교를 오가며 이 비를 보며 겪었을 주민들의 고통을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해방이 되자 지방 유지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중학원과 국민학교를 속속 설립해 나갔다. 중학원은 정규 중학교 인가를 받지 못한 단계에서 임시로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학교다. 주로 설립자나 교사들은 진보적인 성향의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중문중학원에 재직했던 교사나 재학 중이었던 학생들이 토벌대에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문중학교(옛 중문중학원)

1945년 10월 4일 이승조를 원장으로 중문중학원(중문중학교 전신) 설립되었다. 이승조는 중문면장이자 중문중학원장이었다.1947년 3.1절 기념행사 당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이 사망하자 이에 항의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1947년 5월 7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이승조원장이 그만둔 후 이북 출신 교사가 교장서리로 있으면서 중문중학원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극한 대립의 상황이 오면 중립이란 없다.

1948년 11월 5일 무장대에 의해 중문중학원 건물이 전소된다. 이후, 학생들은 중문대동학생돌격대(중문 학련의 전신)를 조직하고 합숙했다. 당시 학련은 파견대장 중위 서봉호와 연락하거나 심부름하면서 토벌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약 1개월 동안 파견대장 서봉호지원으로 선무공작대를 구성하여 안덕면과 서귀면 일대를 순회하면서 선무활동을 하기도 한다.


토벌대와 무장대 사이에서 양쪽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상처를 안고 있는 중문동.

중문관광단지가 들어서고 관광객이 붐빈다. 맛집으로 소문난 칼국수집 앞에 번호표를 받고 대기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길가에 화분을 내어 놓은 꽃집이 서정적인 멋을 부린다. 뭉게구름처럼 피어난 멀구슬나무의 연분홍 꽃은 거리를 화사하게 꾸민다. 4·3의 아픔을 애써 잊고 사는 듯 하지만 '육지 것들'이란 말로 속내를 은근히 내보인다. (2023.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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