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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Jun 11. 2024

백제의 두번째 수도 웅진, 공주 공산성

공주 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웅진(공주), 사비(부여), 금마저(익산) 일원의 백제역사유적지구를 둘러볼까 한다. 백제는 우리나라 중서부 일원을 국토로 하여 기원전 18년에 개국하여 기원후 660년까지 이어진 고대 왕국이다.

백제 역사기행. 2021. 9. 14(화) 그 첫 번째 탐방지로 공주의 공산성을 계획하였다. 공주는 백제의 두번째 수도다. 고구려의 한 갈래로 한강의 남쪽 하남(위례성)에 자리 잡아 나라를 세웠던 백제인이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남하하여, 금강 건너 그 남쪽 곰나루(웅진)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공산성 둘러보기는 서문에서 시작하여 서문으로 나온다. 들머리에서 위세 당당히 늘어선 비석군을 만난다. 한때 충청도 관찰사가 있었던 조선시대 공주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공주 곳곳에 산재해 있던 47기의 송덕비를 이곳에 모아 놓았다. 주로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아에 배치되었던 관리들이나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들이다. 이를 두고 유홍준은 공주의 역사적 힘을 은근히 과시하는 유물이 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공산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다. 그 중 서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이 금서루다. 원래의 금서루는 성안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 사라졌다가 1993년에 새롭게 지어졌다.

현 문루는 원 서문의 위치보다 남쪽으로 조금 이동하여 지은 것이지만, 철종 10년에 편찬된 공주목 읍지 「공산지」의 문헌 기록 등의 고증에 의해 복원되어 조선시대 성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서루에 올라 공주 시가지를 내려다 본다. 사진의 왼쪽 문을 통하는 도로는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의 순교지인 황새바위, 그 뒤편 중앙으로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으로 이어진다. 서문앞 미나리꽝이었던 넓은 들은 음식점과 상가가 줄지어 있는 시가지가 되었다. 

서문을 들어서서 성안을 둘러보다가 성벽을 오른다. 공산성 안내 팸플릿에 소개된 '성 한바퀴 둘러보기'중 성벽을 오른쪽으로 따라도는 첫번째 길을 선택한다. 

성벽에 황색 깃발이 나부낀다. 성벽의 깃발은 동서남북 각 방향에 따라 그림과 색깔이 다르다. 깃발의 바탕색은 모두 황색이다. 황색은 백제인들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하는 나라색이다. 깃발의 테두리는 사신도의 각 동물이 상징하는 색으로 표현했다. 깃발은 송산리 6호분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다. 사신도에 따라 서쪽의 금서루에는 백호가 반영된 깃발이 배치되었다. 


성벽 위를 걷는다.  해발 110m 공산의 능선과 깎아 지른 듯한 절벽을 따라 쌓은 성벽은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천연의 요새다. 길이는 2,660m에 이르는 성벽은 백제시대에는 토성과 석성이 함께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아 현재는 대부분 석성이다. 토성은 동쪽에 735m만 남았다. 

추정 왕궁지로 들어선다. 고구려에 힘에 밀려서 남하하여 조그맣게 지은 왕궁이지만 64년간 웅진을 터전으로 나라를 재건한 곳이다. 현재의 쌍수정 앞 넓은 터에서 1980년대 중반 발굴조사로 대형 건물지와 돌로 쌓은 연못터, 창고 등의 흔적과 백제시대 기와와 토기, 청동거울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어 이곳을 웅진 도읍시기 백제 왕궁터로 추정하고 있다. 

충남 문화재자료 제49호인 공산성 쌍수정은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이 1734년(영조10년)에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다. 조선시대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일시 파천하여 5박6일간 머물면서 두그루의 나무 아래서 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 인연으로 난의 평정 소식을 들은 인조는 두 그루의 나무에게 정3품 통훈대부의 벼슬을 내린다. 이 일 이후 (백제땐 웅진성으로, 고려땐 공주산성으로 부르던) 공산성은  쌍수산성(樹山城)으로 불렀다. 현재의 쌍수정은 1970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이수항이 세운 쌍수정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쌍수정 사적비(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5호)가 보호각 속에 모셔져 있다. 앞서 이야기한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은 인조의 6일간의 행적을 기술한 비석이다. 비석은 거북 모양의 받침과 목조 지붕 모습의 머릿돌을 갖추고 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통성이 허약한 인조는 자주 도망을 다닌다. 치욕의 역사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왕이니까 나무 두그루에 벼슬을 내리는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반정 공신 이괄의 난에 밀려 도망 온 왕의 행적을 비까지 세워 기리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이 추정 왕궁지에는 나이 먹은 왕벚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일본 원산지로 알고 있는 이가 많은 왕벚나무는 우리나라 제주도 고유종이다. 제주도 신예리, 봉계동과 전남 대문산에 자생하고 있다. 

왕궁터에서 확인된 백제 연지는 빗물을 받아 저장한 백제의 인공 연못으로 소방용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바닥은 평평하게 다듬은 돌로 깔았다. 벽면의 돌 뒤에는 누수를 막기 위해 점토를 두텁게 채웠다. 연못 안에서 백제시대 토기와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1500년전 고대 백제왕국 부흥기의 향취를 느끼며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힌다. 

다시 오른쪽 공주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진남루의 고개 마루를 향해 천천히 내려간다. 진남루의 깃발이 보이기 시작한다. 황색 바탕에 붉은색 테두리로 되어 있다. 중앙에는 붉은 봉황을 형상화한 주작이 그려져 있다. 

동서남북 네곳의 성문 터가 확인되었지만 두 곳만 남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남문이자 정문인 진남루로 삼남의 관문이었다. 문화재 자료 제48호인 진남루는 조선시대에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석성으로 다시 쌓으면서 문루를 세웠다.  여러 차례 고쳤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진남루를 나서서 마을 쪽으로 비탈길을 1~2분 내려가면 박찬호 골목이 나온다. 박찬호 기념관이 있고, 도로명도 산성찬호길이다. 

성곽의 산책길에는 '청룡'의 파란 깃발이 펄럭이는 것으로 보아 동문이 가까운가 보다. 오르막을 올라간다. 공산성의 동문은 1980년 발굴 당시 문터와 문의 받침돌이 확인되어, 철종10년에 편찬된 「공산지」를 기록을 기초로 1993년 복원하였다. 「영동루」란 이름은 시민 공모로 지었다. 

영동루에 올라 공주 시가지를 바라본다. 동학농민전쟁의 최후의 결전지인 우금치, 공주목 관아터, 대통사 당간지주가 남아있는 대통사지, 충청감영이 자리했던 곳이 있는 시가지가 보인다. 

성곽에서 임류각 쪽으로 조금 들어오면 광복루(문화재 자료 제50호)가 나온다. 노인 몇 사람이 둘러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다. 성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공주 동남쪽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가장 높은 전망대다. 공산성 안에 주둔한 충청감영의  「중군영」의 출입문인 「해상루」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이곳으로 옮기고 「웅심각」이라 하였다. 해방 이듬해 공주를 방문한 김구, 이시영 등이 「광복루」로 이름을 새로 지었다.  

성곽을 따라 돌면 임류각 옆에 도지정 문화재 제36호인 명국삼장비가 서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 군대가 공주에 주둔했다. 당시 명군을 지휘한 세 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금강변에 세운 명장비가 우여곡절 끝에 해방 후 이곳으로 옮겨졌다.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임류각 옆을 지나간다. 백제 동성왕 때 왕궁의 동쪽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지은 누각이다. 왕과 신하들의 연회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15m 높이의 건물이다.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장신구와 무덤방의 벽면에 새겨진 무늬를 재현했다. 

장대지 옆 전망데크에 앉아 구비쳐 흐르는 아름다운 금강을 바라본다. 집현전 학사였던 서거정이 공주의 빼어난 운치와 공산성의 절경을  「공산의 훌륭한 경치 천하의 으뜸이요, 오현이 우뚝 솟아 사방을 진무하네」 라고 노래했다. 

오랜 세월 동안 강물이 실어나른 모래로 형성된 모래톱, 미르섬이 보인다.  공산성의 성곽의 모습이 용의 형상을 닮았다는 점에서 영감을 얻어 이 모래톱을 미르(용을 가르키는 순 우리말)섬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공산성에는 상수리나무가 많다. 상수리나무의 이름은 원래 '토리'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몽진한 선조의 수라상에 토리(지금의 도토리)로 쑨 묵을 올렸는데, 이를 연유로 토리를 '상수라'라 하였다. 이것이 다시 '상수리'가 되었다. 

성곽길은 내리막길이다. 서문에서 이 길을 올라 왔으면 땀께나 흘렸을 길이다. 내리막이니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둔치의 풍경을 감상하며 힘들이지 않고 걷는다. 내리막의 끝이 충남도 기념물 제42호인 만하루와 연지다. 

연지는 단의 형태로 석축을 가지런히 쌓은 약 9m 깊이의 연못이다. 유홍준은 '이 연지는 견실하면서 부드러운 느낌을 주어 백제의 아름다움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찬사를 보낸다. 그 연못 앞,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성곽 위에 만하루가 세워져 있다. 루의 한쪽은 금강이 흐르고 한쪽은 연못이다. 지금은 보수공사 중이다. 

세조 5년에 묘은사로 창건된 영은사는 인조가 피신하여 기거한 뒤 은적사라 하였다. 영은사의 대웅전은 도지정 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임란때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던 호국 사찰이다. 

영은사를 지나면 성곽 산책길 옆에 벙커가 보인다. 조선시대 금강의 얼음을 왕겨에 싸서 보관하던 공산성의 석빙고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약재 보관창고로, 누에알을 적정시기까지 보관하는 잠종저온 창고로도 사용되었다. 

왼쪽에 금강철교(국가등록문화재 제232호), 오른쪽에는 관광용 배다리가 보인다. 강바닥의 모래색이 섞인 듯한 강물의 푸른 빛과 병풍을 두른 듯한 짙은 녹색의 시묘산과 봉화산, 그 위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공주는 서울과 달리 강북에 신시가지가 개발되고 있다. 아파트 단지도 들어서고, 법원도 대학도 시외버스터미널도 들어서고 있다. 강남은 원도심이다. 

더 가까이 가 보자. 나룻배로 오가던 산성동과 신관동 사이에 유동인구와 물류가 많아지자 나무 다리를 놓는다. 하지만 홍수로 떠내려가고 다시 놓기를 반복하다가, 나룻배 수십척을 이어 그 위에 널판지를 깔아 배다리를 놓아 강을 건넜다. 이 배다리 역시 불편하기는 매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에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옮기면서 공주인들의 마음을 달래느라 금강철교를 만들었다. 그 후 금강교는 공주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2020년 개통을 목표로 철교 옆에 제2금강교를 건설 중이다. 

공북루는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 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문의 아래쪽은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위쪽의 마루는 아름다운 금강을 조망하는 장소로 지어졌으며, 문루에는 여러 편의 시와 글이 걸려 있다. 

성안 마을의 너른 마당에  「백제연화」 공연 준비가 한창이다. 이 곳은 조선시대 군영 자리였고,일제강점기에 공주 갑부 김갑순의 쌀 창고가 있던 곳이다. 쌀을 시내로 실어나르던 서문 고갯길이 숲속으로 나 있다. 

공북루를 지나면 공산성 서북쪽 정상에 공산정이 서 있다. 서북쪽 공주의 시가지와 금강, 성안의 유적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다. 이 곳에서 보는 금강의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특히 공주 시가지의 야경이  빼어나다. 기록에 의하면 '후락정'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이 정자는 유신시대에 새로 건축한 것으로 '유신각'으로 불렸다는 씁쓸한 기억이 있는 곳이다. 


성곽 위의 백호 깃발이 펄럭인다. 금서루가 가까워진다. 다시 서문으로 내려가 일정을 마친다. 

공산성은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에도 백제 무왕이 630년 사비성의 궁궐을 수리하는 동안 잠시 머물렀으며, 660년 백제멸망기에 의자왕이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곳이다.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을 둘러보고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유적지로 발길을 옮긴다.(14:50)


운동 시간 1시간 19분(총 시간 2시간)

걸은 거리 4.57km

걸음 수 8,391보

소모열량 341kcal


날씨 :  흐림

온도 : 25℃

습도 : 60% (오후 12시50분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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