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순동 Jun 13. 2024

성주사지에서 '이심전심, 견성성불'의 뜻을 되새긴다

보령 2

사적 제307호인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전사한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국가차원에서 창건한 호국사찰로 백제 멸망과 함께 폐허가 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는 적마가 나타나 절 주위를 맴돌며 밤낮으로 울었다한다.


통일신라 시대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종을 공부하고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대사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성주사를 다시 크게 일으켰다. 처음에는 오합사라고 부르던 절 이름도 신라 문성왕이 성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보령 성주사지(사적 제307호)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소재한 성주사지의 전경.

불경이 어려워 일반 백성이 이해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선종은 수양만 잘 하면 마음 속의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종파로 통일신라 말기에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크게 유행한다. 전국에 선종 불교의 중심이 되는 큰 절이 9개가 세워진다.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중국 달마의 선법을 이어받아 그 문풍을 지켜 온 아홉 산문으로, 이를 9산선문이라 한다.


9산선문은 봉림사(창원), 봉암사(문경), 모림사(장흥), 태안사(곡성), 실상사(남원), 성주사(보령), 굴산사(명주), 흥녕사(영월), 광조사(해주) 등 이다. 그 중 성주산문은 가장 규모가 컸다.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 산문으로 알려져 있다. 성주산문의 중심지가 성주사이고, 무염대사는 당대 최고의 선종 승려였다.

성주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17세기 말 폐사된다. 우리는 그 터에 남아 있는 많은 유물로 옛 성주사의 영광을 짐작해 본다. 폐사지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스산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반듯한 넓은 평지 절터에 뒤로 위압적이지 않은 나지막한 산자락이 절터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절집은 없어졌지만 석등, 불탑, 비각, 작은 석불이 폐사지를 지키고 있다. 그 풍경이 오히려 아늑하다고 느껴진다. 왼쪽 비각 앞의 넓은 마당에서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중문-석등-5층석탑-금당의 대불좌-강당으로 이어지는 1탑 1금당 가람 배치에, 오른쪽은 삼천불전지, 왼쪽은 다른 불전지의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성주사지 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통일신라 말기에 세운 석등이다. 지붕돌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과 받침기둥이 가늘다. 높이는 220cm이고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팔각지붕돌 위의 상륜부가 파손되어 있다.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9호)

오층석탑은 성주사 불탑으로 이중 기단 위에 세웠다. 전체 높이는 634cm며, 화강암을 재료로 만들어졌다. 기단부와 머릿돌, 탑신석이 완만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져 우아하고 경쾌한 모습으로 날씬하다. 기단부와 1층 몸돌 사이에 괴임돌이 있다. 이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오층 석탑을 올려 통일신라의 전형적 석탑양식(이중 기단 위에 3층석탑)과는 상이한 모습이다. 백제탑과 신라탑의 양식이 혼합된 것인지 5층석탑의 이유를 정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으나, 희귀성 때문에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성주사지 석계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성주사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은 통일신라 때 만든 것이다. 누가 봐도 위의 세 계단과 양옆의 사자상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다르게 보인다.  뛰어난 조각 기법으로 제작된 사자상을 1986년 도난당하고, 지금의 것은 복원된 것이다.

금당의 불상좌대

본존상을 모신 본당이 있었던 금당터로 올라간다. 금당의 불상좌대다. 본좌불은 사라졌다. 좌대의 크기로 보아 거대한 불상이 모셔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불상좌대 뒷편으로 보이는 비슷하게 생긴 3기의 삼층석탑이 금당과 강당 사이에 위치해 있다. 학계에서는 불교 건축물의 공간활용 예나 교리상으로 볼 때 그 배치가 이례적이라는 의문을 갖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3기의 삼층탑 밑에서 후세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이 유력하다. 왜, 어디서, 언제 옮겨온 것인지는 모르나 정교하면서도 단아한 자태가 문외한인 내가 봐도 명작임에는 틀림없다.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

가운데 있는 석탑을 먼저 살펴본다. 높이가 410cm로 신라초기 보다 규모가 작아져 아담하지만, 2중기단 위에 3층석탑의 기조는 유지하고 있어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재료는 반려암이고 안정감이 있으며, 지붕돌의 윤곽이 날카로운 점이 특징이다.

1층 몸돌의 문 그림이 새겨진 '자물쇠와 고리' 문양

1층 몸돌에는 문 그림이 새겨져 있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새겨 놓았는 것을 미루어 보아 몸돌 안의 사리공에 부처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성주사지 서 3층석탑(보물 제 47호, 왼쪽), 성주사지 동 3층석탑(보물 제2021호, 오른쪽)

서쪽 탑으로 간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443cm이다. 탑을 화려하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지붕돌에 금동판이나 장식품을 매달 작은 구멍이 있다.


동쪽의 탑으로 간다. 2중 기단 위의 3층석탑, 면석과 몸돌에 새겨진 기둥, 지붕돌에 새겨진 4단의 층급 받침 등이 나머지 두 석탑과 다름이 없다. 또 1층 몸돌에 새겨진 문 그림, 자물쇠와 고리 등도 동일한다. 같은 시대에 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진 닮은꼴이다.

그런데 이 탑만 일제 강점기부터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다가, 1973년에 충남 유형문화재로, 2019년에는 다시 보물로 지정되었다.

금당으로 오르는 중앙 계단

금당으로 오르는 중앙 계단은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계단 좌우의 소맷돌(계단의 난간)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삼천불전을 지키는 민불

금당 오른쪽은 <사적기>에서 말하고 있는 삼천불전이 발굴된 곳이다. 이 삼천불상은 신라 문성왕 때 만들어졌고 과거 · 현재 · 미래의 각 천불을 의미한다.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교리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출토된 여러 점의 소조불두는 국립부여박물관과 동국대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민불 한 기가 홀로 이 삼천불전을 지키고 있다. 이 불상은 오랜 세월의 풍우 속에 원래의 모습을 알기 힘들 정도로 풍화되었다. 귀도 코도 손도 원 모습을 잃었지만, 소박한 민불은 권위적인 모습이란 찾아 볼 수 없고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성주사지 왼편에 '낭혜화상탑비'를 모신 비각이 세워져 있다. 이 탑비는 성주산문을 일으킨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진성여왕의 명을 받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최치원의 사촌동생 최인곤이 해서체로 쓴 비석이다. 그러나 붓글씨를 비석에 신묘한 기술로 새긴 장인의 이름은 남아있지 않다.

'낭혜화상탑비'를 모신 비각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전체 높이 455cm, 비신 높이 263cm, 너비 155cm, 두께 43cm

남포오석으로 제작된 이 비석은 현재 거북 모양을 한 받침돌의 머리와 몸체부분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고, 앞면 비문 일부가 심하게 마멸되어 해독하기 어렵게 된 점이 아쉽다. 하지만 4면에 구름과 용을 생동감 있게 조각한 비석의 머리는 무늬가 선명하고, 비석의 몸체와 비석의 머리를 갖춘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비문에는 무염대사의 성장과 출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공부하는 과정, 귀국 후 성주사를 일으키고 불법을 전하는 과정 등 무염대사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특히 신라의 골품제도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신라 선종사와 당시의 신분제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는다. 이 탑비가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 탑비 가운데 최고의 비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최치원의 명문장, 사료로서의 가치, 서예적 가치, 뛰어난 조각술과 완벽한 보존상태, 규모의 웅대함에서 찾을 수 있다.

낭혜화상탑비를 모신 비각 주위에 널려있는 승탑 조각

비각 옆에 승탑의 조각으로 보이는 연꽃무늬 받침돌과 지붕돌 등이 널여 있다. 왜 여기에 전시해 놓았는지 안내가 없다. 사라진 무염대사의 승탑를 암시하는 것은 아닐지 의문이 든다. 비문에 기록된 '무염대사가 입적한 지 2년 후에 세웠다'는 승탑은 행방이 묘연하다.

낭혜화상비각 쪽에서 본 성주사지의 모습
강당에서 앞쪽으로 바라 본 성주사지의 모습

성주사지 앞쪽으로 만수산의 나지막한 능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린다. 그 사이로 흐르는 성주천의 물길을 거슬러 심원계곡로를 따라 가면서,


'모든 인간이 내면에 부처가 있다고 믿고 수행함으로써 자기 내면에 있는 부처를 발견하여 성불하고, 부처의 마음을 마음으로 전한다'는 무염대사의 가르침을 생각한다. '이심전심 · 견성성불 · 불립문자 · 교외별전'의 뜻을 되새겨 본다.


참고 문헌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다음백과, 현지 안내문













매거진의 이전글 보령 석탄박물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