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왜관' 담장을 그리며 걷는 대청로와 백산길

중구 골목투어 3 (대청동, 동광동, 중앙동)

by 정순동


초량왜관 북쪽 담장과 대청로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대청로를 따라 동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대청로는 부산착평공사 당시 용두산과 복병산을 깎아 생긴 도로다. 초량왜관 북쪽 담장이 있던 길이다.

용두산을 중심으로 2미터 높이의 돌담으로 둘러 쌓인 초량왜관의 북문은 대청사거리 근처에 있었다. 일본 사자(使者)가 국가의례를 위해 연향대청에 출입할 때 이용하던 연석문(宴席門)이다. 담장 주위에는 여섯 개의 복병소(伏兵所)가 설치되어 왜관 출입을 관리했다.
변박, <왜관도>중 초량왜관 북문과 연향대청, 국립중앙박물관

'연향대청'의 흔적

광일초등학교 안에 '연향대청(宴享大廳)이 있던 곳'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연향대청'은 조선 후기 왜관에 온 일본 사절에게 연향을 베풀던 연회장이다. '연향대청'에서 '대청동'의 동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연향대청 터는 그 후 일본인의 농지가 되었다가 학교부지로 바뀐다.

광일초등학교는 (1877년에 개교한 부산 최초의 일본인 학교인 부산제1심상소학교에서 해방 후 재 개교한) 남일초등학교와 (1910년 개교한 일본인 학교 부산제7공립심상소학교에서 해방 후 재 개교한) 동광초등학교를 통합한 학교다. 초량왜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채 오랜 전통을 이어간다.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

우리의 탐방길은 광일초등학교를 지나 중구청으로 통하는 샛길, 대청로 99번 길로 꺾어진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붉은 벽돌 건물,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을 만난다. 부산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근대건축물이다. 1924년 캐나다 선교사 카트라이트 신부가 남긴 유산으로 부지를 마련하였다. 뽀쪽한 종탑과 제단 아치의 석재장식이 빼어나다. 성당 건축의 전통과 현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 수용시설로 이용되기도 했다.


조선은행장 일본인 사택을 개조했다고 전해지는 대청동주민센터가 있는 골목으로 한 블록 더 들어간다. 가림막으로 가려진 넓은 빈터가 있다. 조선의 수산 왕, 카시이 겐타로의 일본식 저택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방치되어 있다. 일본인 카시아 겐타로는 의친왕 이강이 소유하던 진해의 어장을 임대하여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용두산 기슭에 위치한 동주여자상업학교의 전신인 '부산상업야학교' 설립자이기도 하다.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등록문화재 제573호)

부산기상관측소(부산시 기념물 제51호)

복병산길로 들어선다. 부산에서 내로라는 집의 자녀가 다니던 사립 남성초등학교 가는 길이다. 엘리베이터가 있어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학교 뒤를 돌아 부산기상관측소로 올라간다.

부산기상관측소는 1904년 일본 기상대의 임시측후소로 보수동에서 업무를 개시하였다. 1934년 대청동의 복병산(해발 고도 76.6미터) 정상에 지상 4층 규모의 건축물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세계기상기구(WMO)가 선정한 ‘100년 관측소’다. 전 세계 1만 3,000여 기상관측소 중에서 291곳 뿐이며, 우리나라는 부산과 서울 기상관측소 2곳이 ‘100년 관측소’에 포함됐다. 우리나라의 면적을 생각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하여 한국전쟁 중에도 기상업무를 수행하며 꾸준히 기록을 남기고 지속적인 품질 관리에 애쓴 선조들의 노고에 따른 결과이다." _ 출처: 《국제신문》 2021. 08. 22. 자

부산항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배를 형상화하였다. 얼핏 보기에도 아름다운 건물이다. 르네상스 풍의 외관, 외벽의 마감 재료, 조형적 형태, 목재 창호와 난간의 디자인 등에서 섬세함이 돋보인다.

정문이 길을 막는다. 사전 예약을 해야 문이 열린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린다. 산꼭대기 외진 곳에 있어 찾아오기 힘든 곳이라 아쉬워한다.

부산기상관측소 (부산시 기념물 제51호)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옛 한국은행 부산본부)

용두산공원 가는 길과 대각사 가는 길 사이의 대청로변에 부산근현대역사관을 개관했다.

대한제국의 국책 은행(일제 강점기 조선은행 부산지점)이었던 한국은행 부산본부. 한국전쟁 중에 단행한 두 차례의 화폐개혁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이천승이 설계하여 1963년 신축하였다. 금융 건축의 전형적인 평면 형식을 갖추고 있다. 거액의 현금을 보관하던 은행 금고, 육중하고 거대한 금고 철문, 외부 침입에 대비한 이중 구조의 콘크리트 금고 벽체, 금고 문이 실수로 닫혔을 때를 대비한 비상 탈출구, 곳곳에 설치된 비상벨 등 은행 특유의 진기한 시설과 공간이 온전히 남아 있다.

이 건물을 부산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하였다. '부산근현대역사관'으로 재탄생했다. 개항기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부산사람들의 발자취를 들여다볼 수 있는 부산근현대역사관의 본관이다. 옛 부산근대역사관(옛 미문화원)을 별관으로 연계하여 운영한다.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옛 한국은행 부산본부, 부산시 문화재자료 제70호)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 (옛 부산근대역사관, 미문화원)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해방 후에는 미군 숙소, 미영사관, 미문화원이었다. 외세 지배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라 부산시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1999년 부산시에 반환되어 부산근대역사관, 부산근현대역사관(별관)으로 변천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나이 많은 경비원이 영어를 원어민처럼 유창하게 한다. 깜짝 놀라 어디서 영어를 배웠느냐고 물어보았다. 50년대 말 중학교 다닐 때 교장의 소개로 미문화원을 드나들며 배웠다고 한다. 영어교육 시설이 제대로 없었던 시절 미문화원은 어학원 역할을 하며 젊은이에게 다가갔다.

1982년 3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란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문부식, 김은숙 등 고신대 학생들이 불을 지르고 “미국은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유인물을 뿌렸다.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를 방조하고 광주학살을 용인하였다는 것이 방화의 이유였다. 신문과 방송은 방화의 이유를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의 입을 틀어막지만 학생들의 주장은 점차 알려진다.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천주교인을 탄압하여 종교계의 민주화운동을 촉발한다. 이 사건으로 사회는 꽁꽁 얼어붙는다. 방화라는 테러 방식의 항거가 사회적인 큰 충격을 안겨준다. 더불어 '도대체 미국이 우리에게 무엇인가'하는 그 실체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아내가 고성의 한 중학교에 근무하던 때였다. 휴일이 되어 집으로 오다가 구포다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검문을 당하고 벌벌 떨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았는데 김은숙과 외모가 닮았다고 오해한 것이었다.

부산근대역사관 (부산시 기념물 제49호)


초량왜관 동쪽 담장과 백산길


옛 동광초등학교 터인 용두산공원 공용주차장 앞에 선다. 이쯤에서 초량왜관의 담장을 다시 정리해 보자.

초량왜관의 전체 모습을 옛 기록을 통해 살펴본다. 초량왜관은 가운데에 용두공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청로를 따라오던 담장은 옛 동광초등학교 터를 끼고돌아 남쪽으로 내려간다. 동향사와 왜관의 정문인 수문(守門)이 나온다. 담장은 계속 해안길을 따라 부산부청(지금의 롯데백화점 광복점)으로 동쪽 담장이 이어진다.
초량왜관 개관도, 출처: 동향사 터의 현장 안내판 촬영

백산기념관

백산 안희제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백산은 '구국 운동도 경제 문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라고 인식한다. 1914년 기념관이 있는 이곳(동광동 3가 12번지, 현재 프라임 오피스텔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다. 1919년 경주 갑부 최준 등 영남의 대지주들이 주주로 참여하는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발전하였다.

전시실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과 백산 안희제 선생의 국내 비밀 결사 단체 활동 등에 관한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백산기념관 전경(위), 백산기념관 전시실(아래)

옛 한성은행(한성1918) 동향사 터

백산기념관 옆에 있는 외벽이 붉은 벽돌인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한성1918, 부산생활문화센터 건물이다. 이 건물은 근대적 은행인 한성은행 부산지점이었다. 훗날 조선식산은행, 조흥은행, 신한은행으로 이어졌다. 1918년 신축되어 40여 년간 은행 업무를 보던 곳이다. 60년대 개인이 인수하여 상업 용도로 사용하다가 철거 위기에 놓인다. 이것을 부산시가 매입하여 원형을 최대한 보존한 채 리모델링하여 생활문화센터로 새로 태어났다.

이 건물 맞은편에 동향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동향사는 왜관 안에 있던 절이다. 조일 외교문서의 수발을 담당한다. 대마도에서 파견된 동향사 주지는 조일 간에 오가는 외교 문서와 왜관 업무에 관한 서류를 기록하고 보관하였다.
옛 한성은행 부산지점이었던 '한성1918' 건물

공립 부산유치원 터(부산영화체험관)

동향사 안내판이 있는 골목을 지나서 백산길과 나란히 가는 대청로 126번 길로 나간다. 용두산 공원 바로 턱밑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성1918 건물과는 다른 경우를 만난다. 일제강점기 부산 최초의 공립 부산유치원 자리다. 2001년 방영된 SBS 드라마 <피아노>를 촬영하기도 했다. 부산유치원 건물은 철거되었다. 그 터에 부산영화체험박물관이 들어서서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비록 일본인 유치원으로 개원되었지만 해방 후 한국 초창기 유아교육의 자취를 되돌아볼 수 있는 중요한 근대문화유산이다. 그 건축물이 사라져 아쉬움이 남는다. 모텔을 지을 것이라 알려졌던 곳이다. 영화도시 부산의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영화체험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부산시가 평가받을 일이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 옛 부산유치원 터

수문·개시대청과 금융·행정의 중심가

다시 백산길(옛 해안길)을 따라간다. 타워힐호텔 근처에 왜관의 정문인 수문(守門)이 있었다. 이 문을 통하여 선창을 드나들었다.

수문 밖에는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상대로 새벽시장(朝市)이 섰다. 매일 아침 쌀, 야채, 생선 등의 생필품을 매매하였다. 상거래는 조선 군관들의 통제 아래 이루어졌다. 조시가 상설화된다. 시장이 열리는 시간도 새벽에서 오후 5~7시까지로 늘어났다.

부산의 중심(中心)이었던 중구(中區). 그중에서도 동광동과 중앙동은 ‘부산의 금융, 행정의 중심가’였다. 일제강점기 부산의 19개 은행 가운데 14개의 은행이 동광동에 있었다.

부산시청은 연제구로 옮겨갔다. 지금은 점점 쇠퇴하여 ‘원도심’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퇴락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아직도 ‘백산길’과 그 아래의 ‘해관로’에는 시중은행, 지방은행, 증권회사, 제2금융권까지 수많은 금융기관과 관련 회사 사무실이 집중되어 있다. 행정·상업·금융 중심지임에 틀림없다.


부산호텔과 하나은행, 우리은행으로 둘러싸인 곳, 한정식집 영빈관이 있는 블록은 개시대청(開市大廳)

이 있던 자리다.

개시대청은 조선과 일본의 사무역 거래소다. 개시무역은 한 달에 세 번 열리다가 1610년부터 한 달에 여섯 차례(3, 8, 13, 18, 23, 28일)로 늘어났다. 조선산 인삼과 일본산 금, 은, 구리 유황, 납 등의 광산물을 거래하는 직접교역, 중국산 생사·견직물과 동남아시아산 단목·흑각·후추 등을 거래하는 중개무역이 이루어졌다. 개시무역은 관청에서 발급한 행장(行狀)을 가진 특권상인만 참여할 수 있었다. 왜관에서 대일무역에 참가했던 상인을 동래상인이라 한다. 동래 출신 상인뿐만 아니라 서울상인과 개성상인도 포함한다.
왜관의 정문인 수문이 있었던 곳(왼쪽), 옛 개시대청 터(오른쪽)

50년대 부산 최고의 외화 개봉관, 시민관

우리은행을 지나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서 광복로를 만난다. 부산시민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의 영화를 떠올리는 공간이 있다. 광복동 입구에 50년대 부산 최고의 외화 개봉관, '시민관'이 있었다.

1913년 일제강점기 부산의 3대 재벌의 한 사람인 오이께의 집을 빌려 변사가 있는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상생관'. 1929년에는 최초의 일본 발성영화 <마담과 아내>를 상영했다. 해방 후 미군 교회가 되었다가 대중극장, 부민관을 거쳐 시민관이 되었다.

아내는 60년대 말 클로드 를루슈가 감독하고 아누크 에메와 장루이 트린티냥이 출연한 프랑스 영화 <남과 여>를 이곳에서 보았단다. 우연히 아이들의 기숙학교에서 만난 중년의 독신 남녀가 충동적인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두 사람 모두 죽은 남편과 아내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에 본 이 영화는 아내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옛 시민관 터(현 한국투자신탁증권 부산지점)이다. 오른쪽 건물은 부산데파트다. 초량왜관 당시에는 이 근처에 선창이 있었다.

1953년 부민관에서 시민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알프렛 히치콕 감독의 <암굴의 야수>를 상영한다. 이를 시작으로 '시민관 전성시대'를 연다. 그러나 1956년 현대극장과 국제극장의 등장으로 하향세를 걷다가 1960년에 들면서 재개봉관으로 밀려난다. 1.5류 정도의 자존심을 지키며 분투하지만, 1976년 개관 60여 년 만에 폐관되는 아픔을 맞이한다.

폐관 후 철거된 자리에는 한국투자신탁증권 부산지점이 신축되었다. 목이 좋아 선거 때만 되면 후보의 걸개 사진이 걸리는 선거 사무실로 이용되곤 하던 이 건물의 1층에는 카페가 차지하고 있다.

그 옆 해관로 끝머리와 중앙대로 사이에 부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부산데파트가 있다. 1968년 3월에 부산상공회의소가 '시장 현대화 계획'에 따라 전통시장인 동광시장을 철거하고 지은 건물이다. 부산 최초로 백화점 형태의 시장인 부산데파트를 개장하였다. 2012년 7월 개봉한 영화 <도둑들>을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재건축이 추진 중이다.

'부산중구 골목투어 4'에서 초량왜관 담장 따라 걷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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