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한말 부산에는 일본인 인구가 점점 늘면서 일본인 전관거류지를 확장하여야 할 필요가 생긴다. 또 부산본역인 초량역이 일본인 전관거류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일본인들은 불편을 느낀다. 당시에는 쌍산(영선산과 영사관산)이 나란히 이어져 영주동 앞 바닷가로 뻗어있었다. 본역인 초량역과 용두산 일대의 일본인 전관거류지를 가로막았다. 아래 그림에서 해안으로 돌출된 두 산이 쌍산이고 왼쪽의 산이 복병산이다. 그 사이의 고개길이 영선고개다.
변박, <왜관도>중 쌍산과 영선고개, 국립중앙박물관
일본인은 '부산착평공사'를 시작한다. 영선고개 앞의 쌍산(영선산과 영사관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었다. 또 그 흙으로 해안을 매축한다. 아래 사진 <1912년 부산 중구 중앙동 쌍산 착평후 시가>의 왼쪽 위가 영도 봉래산, 오른쪽이 복병산과 용두산이다. 가운데 넓은 땅이 착평공사로 생긴 새마당, 중앙동이다. 그 위에 중앙대로가 생기고, 철길이 제1부두까지 연결된다.
1961년에는 서구 동대신동과 중구 영주동을 연결하는 부산 최초의 영주터널이 뚫린다. 후에 제2터널이 뚫려 쌍굴이 되었다. 이를 부산터널이라 부른다.
<1912년 부산 중구 중앙동 쌍산 착평후 시가>,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2018년 공유저작물 DB
'초량객사'터와봉래초등학교
중구와 동구의 경계를 (부산터널과 연결되는) 영주고가로인 줄 아는 이가 많다. 과거 청국영사관을 중심으로 한 청나라 조계지를 청관마을이라 불렀다. 청관마을은 동구 초량동이 아니라 중구 영주동에 있었다. 지금의 청관거리의 일부가 영주동이다.
중구 골목투어는 청관거리(상해거리) 끝자락에서 시작한다. 영주동 할매복국집 앞의 육교를 건넌다.
옛 청관거리 남쪽 입구, 영주동 할매복국집
유서 깊은봉래초등학교를 먼저 만난다.
봉래초등학교의 전신은 1896년에 박기종(朴琪淙)이 설립한 사립 개성학교(開成學校)다. 이듬해 공립 부산 개성학교가 된다. 1909년 중등과는 (훗날 부산상고와 개성중학교가 되는) 공립부산실업학교, 초등과는 공립부산보통학교로 분리된다. 그 후 초등과는 1938년 4월 부산봉래공립심상소학교, 1941년에 부산봉래국민학교, 1996년 3월에 봉래초등학교로 이어져 오면서 112회(2022년 기준)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봉래초등학교 자리는 조선시대 '초량객사'가 있던 곳이다. '초량객사'는 일본 사절이 부산에 도착하여 맨 먼저 조선 국왕에게 숙배례(왕에게 공손히 절하는 의식)를 올리던 장소다. 개항 이후 부산 감리서, 부산지방 재판소 등으로 사용되다가 개성학교, 오늘의 봉래초등학교에 이르게 되었다.
대창동으로 내려간다. 영주고가교에서 중부경찰서까지가 대창동 1·2가(법정동)다. 쌍산을 깎는 착평공사로 생긴 평지가 대창동(행정동은 동광동)이다. 중앙대로를 따라 길게 조성되었다. 이 지역에 깎아지른 절벽이 많이 보이는 것은 착평공사 때문이다. 중부경찰서 뒤 부원아파트 절벽도 착평공사로 생긴 것이다.
새마당 인근에 큰 창고가 많아서 대창동이란 동명이 생겨났다는 설도 있지만, 북항 매축 사업을 주도한 '오쿠라(大倉)'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영욕의부산일보 터를 바라보며
한화손해보험 빌딩으로 간다.
부산도시철도 1호선 17번 출구 앞, 한화손해보험 건물은 부산일보 옛 중앙동 사옥이었다. 1946년 9월 창간된 부산일보. 한국전쟁 중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고, 피란민이 집중되면서 독자수가 크게 늘어났다.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에 의해 사옥과 인쇄시설이 강제 징발되고, 1953년에는 부산역전 대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새로 마련한 사옥이 있던 곳이다. 1984년 수정동 현 사옥으로 옮기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부산일보 옛 사옥과 동아일보 부산지사 사옥
그 왼쪽에 동아일보 사옥이 있다. 부산일보가 1959년 한국 최초의 민간 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을 개국하여 국내 신문사 중 최초로 방송매체를 보유한다. 이어 한국문화방송(MBC)를 개국하고, 서울에 부산일보 지사를 두고 부산과 서울에서 동시에 윤전기를 돌리려는 계획을 한다. 당시 최고 신문이었던 동아일보는 위기를 느낀다. 동아일보도 서울ㆍ부산 동시 인쇄 체제를 염두에 두고, 부산일보 사옥 옆에 부지를 마련한다.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난다. 군사정권의 압박에 김지태 사장은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의 운영권을 포기한다. 부산일보는 부산문화방송 및 자매기관인 한국문화방송(MBC)과 함께 5·16 장학회에 귀속되었다. 부산일보의 부산ㆍ서울 동시 인쇄 계획은 무산된다. 자연히 동아일보의 계획도 무산되고 오랫동안 사옥부지는 빈터로 남아 있었다.
부산일보의 소유권에 대한 정당성 논란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언론의 굴곡진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두 건물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피란살이 애환을 품은 '40계단'
중앙동에는 곳곳에 착평공사로 생긴 급경사의 오르막이 있다. 최근에는 계단을 지그재그로 만들어 오르막의 경사도를 완만하게 하였다. 혹은 엘리베이터를 운행하고 있다. 주민의 보행을 편하게 하기 위한방책이다.
인쇄소들이 모여 있는 인쇄골목 중간에 위치한 40계단.그냥 계단이 40개 있는 평범한 계단이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역과 부두가 가까운 이 인근에 피란민들이 몰려든다. 고지대에 판잣집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선다. 40계단은 부두 노동자들이 오가는 길목이 된다. 유동 인구가 많아지고 구호물자를 내다 파는 장터도 생긴다. 자연스럽게 외지인들에게 부산을 대표하는 장소로 알려졌다. 피란길에 "혹시 헤어지거든 영도다리나 40계단에서 만나자"고 미리 약속했을 정도다. 해방 직후 위세를 떨치던 우익단체 '학생연맹' 사무실도 이곳에 있었다.
동광동 40계단
중구는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 40계단까지의 거리를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로 조성하였다. 영주동ㆍ동광동ㆍ대청동 일대에 살았던 피란민의 애환을 되새기는거리다.
1951년 박재홍이 부른 <경상도 아가씨>.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라고 시작한다. 또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오프닝 신에 '40계단'이 등장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6월 항쟁의 숨은 격전지
가파른 계단길을 오른다.
한국전쟁 때 형성된 판자촌에 길이 조금씩 넓혀지고 소방도로도 생겼다. 주거공간도 많이 개선되었다. 내가 출퇴근하며 오르내리던 골목이 낯설게 느껴진다. 경사를 완만하게 계단을 개선하였다고 해도 오르막은 숨이 턱턱 막힌다. 느릿느릿 걸어 중구청 앞에 선다.
중구청과 메리놀병원 사이의 도로는 영주동 부산터널 입구 삼거리에서 코모도호텔을 거쳐 카톨릭센터, 대청 사거리로 넘어가는 영선고개다. 이 고갯길은 영선산과 복병산 사이로 난 길인데,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부산에서 처음으로 아스팔트로 포장하였다하여 유엔고개라고도 불렀다. 망양로에서 갈라져 내려오는 도로와 중구청 앞에서 합쳐진다. 삼거리다.
부산광역시 중구청
6월 항쟁 때에는 이곳 삼거리가 격전지였다. 인근의 가톨릭 센터에 항쟁 지도부가 들어가 있었다. 서울의 명동 성당과 같았다. 아침이 되면 각 대학에서 출정식을 한 학생들이 남포동에서, 중앙동에서, 부산역에서, 대신동에서, 대청동에서, 보수동에서 가톨릭 센터를 향해 올라온다.
전경과 백골단이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가톨릭 센터로 오르는 길을 막았다. 시위대는 산복도로로 우회한다. 민주공원 버스정류장에서, 코모도 호텔의 영선고개에서, 40계단에서 군중들이 삼삼오오 중구청 앞으로 모여든다. 전경과 백골단은 중구청과 메리놀 병원 앞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가톨릭 센터로 가는 길을 막았다. 경찰과 시위대는 격돌한다.
1970년대 영주동과 초량동, 왼쪽 위의 높은 건물이 디지털고등학교다. (출처: 부산시청)
메리놀 병원 북쪽 담장. 디지털고등학교로 오르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 등교하던 학생들이 숨이 차서 잠시 쉬며 숨을 들어 키는 순간, 길가의 재래식 화장실의 문이 열리기라도 하면 낭패를 본다. 주거환경이 열악했다.청소차, 분뇨수거차는 물론이고 소방차도 동네로 들어 올 수가 없다.
청소차와 분뇨수거차는 망양로로 와서 학교 정문 앞에 댄다. 오전 10시경 환경 미화원들은 골목골목 다니며 딸랑딸랑 종을 울린다. 주민들은 쓰레기통을 이고 들고 나온다. 체육 수업하는 학생들 옆을 지나서, 정문 앞 쓰레기차로 허급지급 달려간다. 혹시 쓰레기차가 가버릴까 싶어서. 분뇨수거차 이야기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오름 소공원.
길이 두배로 넓어졌다. 불이 나도 소방차가 들어갈 수 없어 항상 걱정되던 곳이다. 주변의 판잣집은 철거되었다. 부산항을 조망하는 오름 소공원으로 변신했다. 남은 집도 새로 지어졌다. 공원은 디지털고등학교 정원처럼 보인다. 천지개벽이 따로 없다.
길거리에서 현대사를 배운다
다시 6월 항쟁 이야기로 돌아간다.
중구청 앞에서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시위대와 막으려는 전경은 일진일퇴한다. 전경은 속칭 지랄탄이라는 다연발 최루탄 발사기를 쏜다. 시위대가 우왕좌왕한다. 전경은 선두에 선 시위대 머리 위에 (주동자 체포용) 일명 사과탄을 던진다. 최루탄을 덮어쓰면 정신을 못 차린다. 백골단은 괴성을 지르고 위협하며 시위대를 향해 돌진한다. 진압봉을 휘두른다. 시위대는 겁에 질려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한다.
골목길로 숨어든다는게 메리놀 병원 옆의 가파른 계단길로 도망친다. 백골단이 토끼몰이하듯 시위대를 몰아붙이다가 자신들이 유리한 국면이 아니라는 것을 이내 깨닫는다. 도망가던 시위대가 돌아서면 상황은 금세 역전된다. 시위대는 위쪽에, 백골단은 아래쪽에 위치하게 된다. 거기다가 골목에 내다 놓은 연탄재와 쓰레기통 은 시위대에게 좋은 무기가 된다.
, 메리놀 병원 북쪽 담장 옆의 가파른 계단길
시위대는 연탄재나 쓰레기통을 던지고 도망치기를 반복하며 샛문을 통해 학교 운동장으로 뛰어든다. 한번은 백골단이 학교 운동장까지 따라왔다가 혼이 난다. 막다른 골목인 줄 알고 쫓았는데, 복병이 있었다. 중고교생 3,000여 명의 예비대(?)가 교실에서 운동장을 내려다 보고 소리를 지른다. 운동장으로 달려 나와 시위대에 합류한다. 중ㆍ고등 학생에게 진압봉을 휘두를 수도 없고, 대학교도 아닌 중학교 안에서 최루탄을 터트릴 수도 없고(그렇다고 대학교 안에서는 최루탄을 터트려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숫자는 절대 열세다. 백골단은 스스로 물러난다.
그날 이후 중구청 앞에 최루탄이 터지면 학생들을 귀가시킨다. 최루가스로 수업하기가 곤란해서이기도 하지만 교육청과 경찰서에서 학생들을 귀가시켰으면 한다. 말이 협조 요청이지 지시나 다름없다. 담당 장학사는 '오늘은 사상역 앞에서 시위가 있다는 정보가 있으니 학생들이 가지 않도록 귀가지도를 부탁한다'는 바보 같은 지시를 한다. 아니면 말은 못해도 시위의 확산을 은근히 바라는지. 담임교사는 교육청의 지시를 그대로 학생들에게 전달한다. '사상역으로 가라'는 말과 같다. 정보를 알려 주는 셈이다. '가톨릭센터 앞으로 가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하굣길에 길거리에서 현대사를 배운다. 6월항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어느 날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국토론회'가 열였다.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 시민의 정치적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라고 외치는 시민 노무현을 이날 처음 보았다. 그때 고등학생들이 지금 50대가 되었다.
대청동 가톨릭 센터
헌책 냄새가 묻어나는 보수동 책방 골목
보수동 책방 골목으로 간다. 옛날만 못하지만 명성은 이어가고 있다. 헌책을 사고파는 이 골목은 한국전쟁 통에 생겨났다. 길 건너 깡통시장이 그렇듯이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잡지와 만화책을팔기 시작하면서 헌책방골목이 형성되었다. 인근에 모여 살던 피란민이생계를 위해 소장하던 책을 내다 팔기도했다. 90년대까진 진짜 중고서적 위주의 헌책방이었으나, 지금은 신간도 취급한다.
알라딘, 예스 24 등 온라인 대형 서점들이 헌책 시장에 뛰어들어 보수동 책방골목의 입지는 점점 줄어든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역 언론이 몇 차례 보도하여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부산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오늘도 인증 샷을 찍는 관광객이 여럿 보인다.
책방골목에 오면 꼭 가 봐야 할 곳이 있다. 중부교회와 협동서점이 자리했던 곳(중구 흑교로 46번길 10-1)이다. 1978년 중부교회 김형기 목사가 중심이 되어 '양서협동조합'을 결성한다. '좋은 책 나누어 읽기로 시작하여 참다운 인간애 넘치는 부산을 만드는 문화센터'가 창립 목표였다. 이후 양서조합은 부마항쟁 등 부산 민주화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된다.
보수동 책방골목
하지만 종이책이 첨차 밀려나는 것은 시대적 흐름이다. 더욱이 헌책은 그 정도가 심하다. 나는 절판된 책을 사려 종종 이곳을 들른다. 올 때마다 줄어드는 책방. 안타까움에 마음이 짠해진다.
<부산 7000년, 그 영욕의 발자취> 1ㆍ2ㆍ3(최해군, 지평)과 <실록 장편소설 부산포> 1ㆍ2ㆍ3(최해군, 지평)의 6권을 산다. 부산의 원도심 골목투어를 계획하고 있으니, 꼭 필요한 책이다. 운 좋게 저자의 서명이 담겨 있다. 또 몇 권의 구하기 어려운 책을 사장님께 부탁하고 책방골목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