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시내(市內)'는 남포동과 광복동이었다

중구 골목투어 4 (남포동, 광복동)

by 정순동


시내(市內) 가 보자


광복동으로 들어간다. '시내 간다'라고 하던 때가 있었다. 부산의 '시내'는 광복동과 남포동이었다. 중앙동ㆍ동광동이 금융ㆍ사무 중심가라면 광복동ㆍ남포동은 구두ㆍ패션ㆍ대형 주점ㆍ영화관ㆍ고급 카메라점 등이 몰려있는 상가 중심지였다.

자연히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는 장소로 다방문화가 꽃을 피운다. 1950년대 남포동ㆍ광복동에 '비원', '클래식'과 같은 고전 음악다방이 있었다. 6, 70년대로 넘어서면서 '백조다방'이 그 전통을 이어받는다. '클래식 다방 가 봤나'라고 물으면 '광복동 입구 지하에 있던 백조다방'하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았을 정도였다.

광복동 입구

백조다방 골목의 할매 막걸리 집. 흔적을 찾기도 힘든다. 탁자도 서너 개 밖에 없고 메뉴판도 없었다. 그냥 자리에 앉으면 막걸리 한 주전자와 가오리 회무침 한 접시가 자동으로 나온다. 그날 팔 막걸리 한동이가 다 팔리면 초저녁에도 문을 닫았다. 추억 속에만 남아 있는 할매집. 간판도 없었다. 문인과 예술가가 즐겨 찾던 양산박도 이 근처에 있었다.


관수가와 부산경찰서

농협 맞은편 좁은 골목을 통해 기업은행 부산지역 본부 쪽으로 나간다. 광복로 85번길과 대청로 126번길이 만나는 계단 앞에 선다. 계단 입구에 두 개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옛 부산경찰서(왼쪽), 그 자리의 현재 모습(오른쪽)

하나는 의열단 박재혁 열사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알리는 안내판이다. 계단 오른쪽의 6층 건물은 일제강점기 부산경찰서(지금의 중부경찰서 터로 옮기기 전까지)가 있던 자리다. 원래 일본영사관 소속 부산경찰서는 개항기 일본인 거류지와 거류민에 대한 치안을 담당하였다.

일제강점기 부산경찰서는 식민통치의 상징성을 가진 곳이다. 일제의 대표적인 탄압 기구로 의열단의 '5 파괴'대상 중 하나였다. 의열단 박재혁 열사는 만세운동 다음 해 9월 14일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진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응징하였던 이 사건으로 경찰서 일부가 폭파되고 하시모토 서장은 중상을 입었다. 의열단이 성공한 최초의 의거 현장으로 기억해 둘 만한 장소다. 박 열사는 사형집행 전 옥중 단식이 원인이 되어 순국하였다. 이 터에는 지금 노래방과 주점이 들어서 있다.

옛 관수가(왼쪽), 그 터로 올라가는 계단 앞의 안내판(오른쪽)

이 계단 왼편에 또 하나의 일본과 관련된 안내판이 서 있다. 관수가(館守家)를 안내한다.

개항 후 관수가는 일본인 전관거류지 관리관청이고 관리관이 주재하게 된다. 초량왜관의 최고 책임자인 관수(館守)의 집무소이자 주거 공간이다. 관수는 조일 외교교섭을 진행하고 그 과정을 본국(대마도)에 보고하였다. 또 왜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관수 일기'로 남겼다. 관수가는 1880년 부산주재 일본 영사관으로 바뀌었다. 옛 부산시청이 신축되기 전까지 부산부청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해방 후 민간에 불하되어 고급 요정을 하다가 지금은 건물을 헐어 주차장으로 사용한다.

광복로 85번길은 외국서적 골목이다. 미국, 일본 잡지를 전문으로 팔던 서점이 모여 있던 곳이다. 지금은 일본 서적을 파는 집만 하나 남아있다.

일본서적 전문점(왼쪽), 외국서적 전문점들은 철거되어 주차장이 되었고 옹벽 위가 관수가 터다.(오른쪽)

이 골목에는 오뎅을 주 안주로 정종 대포를 팔던 일본식 선술집이 줄지어 있었다. 지금은 일식집 한두 곳만 보인다. 남포동과 광복동 중에서도 유독 이곳에 일본 풍이 많이 남았던 이유는 부산부청, 일본 영사관이기도 했던 관수가와 부산경찰서의 영향이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다시 찾고 싶은 용두산 공원


용두산 공원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선다. 도심에 있는 부산을 대표하는 공원이지만 잘 찾지 않았던 곳이다. 이유를 대면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싫어서 일 것이다. 옛 미화당 백화점에서 공원으로 연결하던 구름다리도 철거되었으니 더욱 그렇다. 용두산을 오르는 입구가 달라졌다. 에스컬레이터가 생겼다. 편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되어, 땀깨나 흘리던 옛날과는 다르다. 조명도 화사하다. 칙칙하던 분위기가 밝고 산뜻하게 바뀌었다.

부산타워, 팔각정, 공원 표지석, 이순신 장군 동상은 그대로다. 예전의 초등학교 운동장에 어김없이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일본을 바라보는 부산항 앞의 용두산이라면 세울 만도 하지 않은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조선 출병 기지인 일본의 가라쓰항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득한 바다를 노려보다’란 글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용두산 공원 올라가는 길

초량왜관의 전경(일명 왜관도)

조선시대 왜관은 조선과 일본이 외교와 무역을 하던 장소다. 조선후기에는 부산에 절영도왜관, 두모포왜관, 초량왜관 등 세 곳에 왜관이 있었다. 초량왜관은 개항 후 일본인 전관 거류지로 바뀌기 전까지 약 200년간 존속하였다. 초량왜관은 외곽에 정방형의 담장을 쌓고 출입을 통제하였다. 500여 명의 대마도에서 파견된 일본인 남자들이 거주하였다. _ 현지 초량왜관 안내문에서

초량왜관 안내판이 서있다.

안내판에는 조선 후기 동래부에서 활약한 무관이자 화가인 변박이 그린 <왜관도>가 함께 게시되어 있다.

<왜관도>는 초량왜관의 경관을 섬세하게 묘사한 회화식 조감도다. 옛날에는 해송이 많아 송현산(松峴山)이라고 불렀던 용두산은 초량왜관과 일본인 전관거류지의 중심이었다. 그 밑에 관수가, 양쪽에 동관과 서관이 배치되어 있다. 담장 밖의 연향 대청(宴饗大廳), 초량객사, 설문, 복병막, 쌍산 등도 상세히 그려져 있다. 선창으로 나가는 정문인 수문, 선창과 용미산은 왜관의 동남쪽에 그려져 있다. 남항에 일본 배가 떠 있다. 칼을 찬 일본인 금도(禁徒)가 수문을 지킨다. 일본인 행상, 부채 든 사람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나뭇짐을 진 조선인이 영선고개를 넘는다.

변박(卞璞), <왜관도(倭館圖)>, 1783, 132.0x58.0cm, 국립중앙박물관

백산 안희제와 이승만

일제강점기, 용두산에는 일본 신사가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이승만 동상이 선다. 공원 이름도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으로 부른다. 자신의 항일 이미지 제고를 위한 장소로 이곳을 택했는지 그 정치적 의도는 모를 일이다. 일제강점기 그의 행적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적절치 않은 조치였음은 분명하다.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을 세운 것은.

4.19 혁명 때 동상은 끌어내려진다. 공원 이름도 용두산공원으로 바뀐다.

그 공원에 백산상회를 열어 독립 군자금을 마련했던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자그마한 흉상이 세워져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반가운 일이다.

백산 안희제 선생 흉상(왼쪽), 꽃시계(오른쪽)

공원이 전체적으로 많이 정비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노인들만 찾는 공원이라는 생각은 쓸데없는 걱정이다. 공원 한쪽의 벤치에 앉아 장기 두는 노인들이 몇몇 보이지만 탑골공원만큼은 아니다.

꽃시계가 1시 35분을 가리키고 있다. 꽃시계 앞에서 사진 찍는 젊은이들은 즐거운 표정이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간 젊은이에게 외면받던 용두산 공원이 심기일전한 모습으로 시선을 끈다. 신선한 변화가 조용한 울림을 준다. 나는 이제 용두산공원을 다시 찾고 싶은 몇 손가락 안의 공원으로 기억하련다.



역사적 고비마다 항쟁의 중심지였던 미화당 백화점 앞 삼거리


구둣방 골목이었던 남포동과 유행의 첨단을 걷던 광복동을 들락날락하며 비프거리로 나아간다. 이 골목길은 유신 말기 '부마항쟁'의 주 무대였다. 당시 시위대는 진압 경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이른바 게릴라전을 벌렸다. 이 골목에서 불쑥, 저 골목에서 불쑥 나타난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구호도 심플하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열흘 후 철옹성 같았던 유신정권은 무너진다.

그 시위의 발자국을 따라 골목골목을 지그재그로 나아간다. 구둣방은 없어지고 음식점과 옷집 거리가 되었다. 할매회국수집, 원산면옥, 서울깍두기는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산면옥에서 점심을 먹는다. 옛 향수를 더듬으며. 손님이 북적여야 없는 맛도 생기는 법인데 손님이 없어 한산하다.

부마항쟁 8년 후, 다시 이 거리는 시위의 중심지가 된다. 1987년 '6월 항쟁'이다. 6월 항쟁은 전국적인 항쟁이었고 부산에서도 지역이 특정되지 않고 전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남포동, 광복동, 국제시장이 주 항쟁지였음은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번에도 게릴라전이다. 역시 구호도 간단한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대통령은 내손으로 훌라 훌라, 독재정권 물러가라 훌라 훌라'


부산 사람들은 '부산이 일어나면 정권이 바뀐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참고 있다가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일어난다는 이야기다. 이번에도 군사정권이 무너진다. 하지만 민주진영의 분열로 민주정권 건설은 실패한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찡해지는 그 구호와 운동가를 외치다가 실의에 빠졌던 시위대의 주력은 이제 50대가 되었다. 그의 자녀 세대는 20대가 되어 이기적인 '공정과 상식'(?)를 내세우며 부모세대와 각을 세운다.

옛 미화당 백화점

창신파출소 앞으로 나온다.

광복동의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미화당백화점 앞이다. 미화당은 없어졌지만 각종 집회도 여기서 열리고 시위도 여기서 한다. 지금도 '옛 미화당 앞'이라고 집회 공지를 할 정도로 미화당은 부산 사람에게 누구든 기억할만한 추억이 남아 있는 장소다. 약속 장소가 마땅치 않을 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미화당 백화점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적이 한두 번은 있었을 것이니까, 인상 깊게 기억되는 장소다.

유동인구가 많던 광복동 상권도 IMF와 부산시청사 이전으로 하락세를 면치 못한다. 부산의 중심상가라는 옛 명성도 빛이 바래고 미화당백화점은 문을 닫는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 지금은 ABC MART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부산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미화당백화점이다. 우리가 이 앞을 지나는 오늘도 이재명 후보의 선거 유세가 열리고 있다.

창선파출소 뒷골목을 들여다본다. 커피전문점 가배, 삿포로 우동집이 남아 있을 리 없건만 혹시 하고 기웃거린다. 옛 미화당 뒤편의 고갈비 골목으로 가 본다. 원조라는 간판을 단 집이 두 곳 남아 있다. 추억을 먹는 것이지 가격은 만만찮다. 이젠 고등어의 위상이 옛날과 다르지 않은가. 골목 분위기도 옛날과는 다르다. 요즘 대세는 카페다. 옛 고갈비 집들이 없어지고 카페가 늘어났다.

옛 문화극장(현 국민은행 광복동 지점)이 있던 곳으로 간다. 중학교 여름방학 때, 문화극장에서 중고생 대상으로 (본 상영시간 전) 조조 특별 상영을 했다. <콰이강의 다리>, <벤허>를 단체 관람했다.

문화극장 옆에 고려당 제과점과 석빙고가 있었다. 석빙고 본점이 있었던 자리쯤에 설빙 본점이 있다. 고려당은 B&C가 되고. 꼭 그 자리인지, 주인이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석빙고나 설빙이나 얼음과자인 점은 같다. 사람들의 입맛 변화에 따라 석빙고가 설빙으로 바뀌었구나.

고갈비 골목(왼쪽), 설빙 본점(오른쪽)



영화와 음악의 거리, 남포동


남포동 극장가 일대를 비프(BIFF) 거리라 한다. 부산극장, 부영극장, 대영극장, 제일극장, 동아극장, 문화극장 좀 더 멀리까지 잡으면 동명극장, 현대극장, 국제극장, 국도극장, 시민관, 왕자극장 등 뭐 또 빠진 곳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6,70년대 남포동, 광복동 일대는 수많은 극장들이 몰려 있어 극장가로 불렸다.

매년 10월 부산에서 열리는 국내 최초의 국제 영화제인 비프(BIFF)가 1996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영화 부흥과, 영화 및 영상산업의 발전에 기여해 온 부산국제영화제는 남포동 극장가 일대에서 형성된 비프(BIFF) 광장의 열기를 모아 시민 축제로 정착되었다. 초기에는 남포동에서 영화를 상영했다. 해운대 메가박스(magabox)와 CGV 센텀시티가 세워지면서 상영장소가 해운대로 옮겨졌다. 2011년 센텀시티에 영화의 전당이 건립되어 그곳을 중심으로 영화제가 개최된다. 비프(BIFF) 광장은 상징적인 공간으로 남아 있다. 겨우 메가박스와 롯데시네마가 영화의 거리를 지키고 있다.

비프 광장

남포동과 광복동을 이야기하면서 빼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다방(茶房)이다. 근대적 기능과 형태를 갖춘 다방은 일제강점기에 등장하였다. 한국전쟁 중 피란수도 부산의 다방은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사교의 장소이자 문화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5,60년대 비원, 금강, 클래식, 미화당 음악실, 아폴로, 백조 등과 같은 클래식 음악다방이 있었다. 음악다방과 함께 무아, 칸타빌레, 르네상스 등의 음악감상실도 7,80년대 젊은이들의 문화공간으로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도 7,80년대 대중음악 감상실 시대를 연 곳은 용두산 공원 입구에 있었던 무아음악실이다.

70년대 남포동, 광복동에는 그 외에도 수다방, 하늘소, 고궁다방, 청다방, 청자다방, 밀다방, 홍실다방, 종다방 등 30여 군데에 달하는 음악다방이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DJ가 100여 명에 이르렀으니 과히 음악다방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었다. 약속 장소로서의 다방이 음악 감상을 위해 모이는 장소가 변했다. 그러나 90년대 들면서 디지털 시대에 밀려 음악 감상의 형태가 음원 중심으로 변화하고 대중의 기호도 따라서 변하여 음악다방은 쇠퇴한다.

영화와 음악으로 대표되던 비프거리는 씨앗호떡과 카페가 점령한다. 대중의 먹성이 바뀌어도 '18번 완당집'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피란 수도의 애환이 서린, 국제시장


초량왜관 담장은 약국거리 끝머리인 국제시장 사거리에서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을 끼고 중구로를 따라 북쪽으로 이어진다.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초량왜관 부지가 약 10만 평에 이르렀다.

세명약국으로 대표되는 약국거리는 예나 다름없이 성업 중이다.

골목을 들여다보면 국제시장 들머리다. 초입의 먹자골목이 예전 같지 않다. 코로나의 영향인지 먹거리 패턴이 달라진 것인지 좌판에 앉은 손님이 적다.

약국거리와 국제시장

해방과 함께 모여든 귀환동포들이 터를 잡고 벌린 좌판이 시장을 형성하였다. ‘도떼기시장’으로 출발하여 1948년에서야 공식적인 시장이 된다. 목조건물 단층 12동을 건립하여 자유시장이라 하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란민이 몰려와 자유시장은 성시를 이루게 된다.

전시에 미군 부대로부터 흘러나오는 군용품과 원조물자·구호품이 민간 소비용품의 부족을 채우게 된다. 외제품이 주 거래품이었다. 속칭 ‘양키시장’이 되었다. 그래서 국제시장이 된다. 휴전이 되고 새로운 경제 질서가 자리 잡자, 국제시장은 일반 도·소매시장이 된다.

최근 국제시장은 주민 참여형 문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안경점, 이불점, 약국, 의류, 공구, 먹거리 등 특화된 테마거리를 만들어 놓고 고객의 관심을 끈다.


조명의 거리, 만물의 거리, 미술의 거리를 차례로 거쳐서, '초량왜관 담장 따라 걷기'의 출발점인 대청사거리 보수동 책방골목 어귀를 만난다. '부산중구 골목투어 5'에서 자갈치로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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