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수리조선 1번지, 깡깡이 예술마을

영도 골목투어 1 (남항동)

by 정순동


부산의 랜드마크, 영도대교


영도가 변신하고 있다. 섬 전체가 복합 문화단지로 새로 태어난다. 그 변화의 선두에 서 있는 마을, 자갈치시장 건너편에 있는 버선 모양처럼 생긴 수리조선소 마을, 깡깡이 예술마을을 찾아간다.


나룻배는 밤에는 운행하지 못한다. 영도를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 점도 문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부산부는 다리를 놓을 계획을 한다. 해운업자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 다리를 설치하면 물살이 빨라져 다리 밑을 지나는 작은 배가 교각에 부딪칠 수 있다는 점, 큰 선박은 오륙도를 거쳐 영도를 우회해야 한다는 점이다. 선박 운항의 안전상 문제와 해운 발전의 문제를 들어 해저터널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부산부는 도개식 대교를 놓기로 결정한다. 1932년 4월에 착공했다.


1934년 11월 도개교를 개통한다. 개통하던 날, 6만여 명의 구경꾼이 지켜보았다고 한다.

영도대교를 개통하던 날, 6만여 명의 구경꾼이 지켜보았다.(사진 출처: 디지털부산역사문화대전)

육지와 섬을 연결한다는 것만 해도 관심을 집중시킬만한 사건이다. 육중한 다리를 들어 올리는 진풍경은 전국에서 6만여 명의 구경꾼을 불러 모았다. 당시 부산 인구는 16만 명. 이 점을 감안하면 그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하루에 두 번씩 들던 다리. 내 기억은 하루에 두 차례였으나 개통 당시에는 하루에 일곱 차례나 들었다고 한다. 1966년 9월 교통 혼잡과 상수도관 설치 문제로 도개를 멈추었다. 그리고 노후화로 철거된다. 확장복원공사를 거쳐 새로 건설된 현재의 영도대교는 2013년 11월부터 하루에 한 번씩 다시 들기 시작했다.

부산대교(왼쪽), 영도대교(오른쪽)

원래 이 도개교가 부산대교였다. 1980년 1월 동쪽 옆에 새로운 다리가 만들어 부산대교라 부르면서 도개교를 영도대교로 바꾸어 불렀다. 공식 명칭은 그렇지만,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그냥 '영도다리'부른다. 영도대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묘사도 다양하게 바뀐다. 영도대교 가설공사에서 희생된 조선 노동자가 17명이나 되어 '유령의 다리', 다리를 들어 올리는 광경이 신기하여 '마법의 다리', 한국전쟁 통엔 '만남의 다리', 새로 복원한 지금은 '추억의 다리'라 한다. 근현대 부산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다리를 건넌다. 영도경찰서 앞에 현인의 노래비 <굳세어라 금순아>가 서 있다. 이 노래는 근현대사의 아픔과 전쟁의 참상을 절묘한 언어로 묘사하여 실향민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이다ㆍ ㆍㆍㆍㆍㆍ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히 떴다"


특히 노랫말 2절이 전쟁 직후의 부산을 연상시켜 큰 울림을 준다. 부산에 정착한 실향민은 영도다리 난간에서 초승달을 바라보며 망향의 슬픔을 되새긴다. 몇 년 전 공천 파동으로 거대 정당의 대표가 '옥쇄 들고 나르샤'한 곳도 바로 이 영도다리다. 표준말이 아니면 어떠랴, 맞춤법에 맞지 않으면 어떠랴.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는 영도에서 태어난 가수 현인의 출신지와 맞물려 부산을 대표하는 노래로 널리 애창되었다.

현인의 노래비 <굳세어라 금순아>

뒤로 보이는 영도경찰서는 '부산여자경찰서'가 있던 곳이다. 미군정은 1946년 여성ㆍ아동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여자경찰제도'를 도입하였다. 부산여자경찰서는 1947년부터 1957년 폐지될 때까지 이곳에 있었다. 최근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하는 일부 극우 정치세력의 행태와 비교하면 신선하게 느껴진다.

이 제도를 이승만 정부는 10년 만에 폐지한다. 그리고 3년 후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한다.


노래비 우측 옆의 다리 밑 태종로 50번길로 계단을 내려간다. 낚시꾼들이 바닷가에 붙어 서 있다. 낚는지 물어본다. 매가리(전갱이)를 낚는단다. 먹을 수 있는가 물으니 물이 깨끗한단다. 내가 보기는 아닌 것 같은데. 건너편에 갈매기 형상을 한 자갈치시장이 보인다.



대풍포 해안을 매축한 대평동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해안을 따라 버선목으로 이동한다. 대평동 물양장이다. 많은 배가 정박해 있고, 어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붉게 녹슨 와이어로프, 닻 등의 선구를 집채처럼 쌓아 놓았다. 선박 부품점도 줄지어 나타난다.

​영도구 대평동은 대풍포라고 불리던 곳이다. 대풍포(待風浦)는 어선들이 거센 풍랑을 피하거나 머물기에 적합한 포구였다. 해방 후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뜻을 담아 풍(風)을 평(平)으로 바꾸어 대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부산포 개항 이후 일본 어선들은 조선 해안까지 몰려와 고기를 잡았다. 자연히 일본 선박의 왕래가 많아진다. 부산데파트 아래에 있던 선창은 이를 수용하기에 한계에 이른다. 어선은 대풍포에 정박한다. 영도는 어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본인이 매축권을 얻어 1916년부터 10년에 걸쳐 대풍포 일원의 해안을 매축한다. 지금의 대평동, 남항동 일대에 4만 2백여 평의 시가지가 생겼다.

대평동 물양장과 수리조선소

일본 어선은 바람을 피하기 좋은 대풍포에서 배를 수리하거나 식수를 공급받았다. 인근의 대평동, 남항동 매축지에 수리조선소나 선박 관련 업체가 집중적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대평동에는 두 군데의 물양장이 있다. 배가 가득 들어찼다. 십여 군데의 수리조선소와 주변에 들어선 선박 관련 부품업체가 협업을 하고 있다.



대평동 깡깡이 예술마을


이 마을의 또 다른 이름은 '깡깡이마을'이다.

배를 수리한 후 도장할 때, 먼저 연삭기로 배에 붙어있는 조개껍데기나 녹을 제거 한다. 연삭기가 없을 때이니 배 표면을 망치로 두들겨 떼어 낸다. 하루 종일 온 동네가 깡깡거린다. 그래서 ‘깡깡이마을’이다. 배에 매달려 망치를 두드리는 깡깡이 작업은 대부분 여자들의 몫이었다.

2015년 부산시의 '예술 상상마을' 공모에 대평동이 대상 지역으로 선정된다. 수리조선 마을인 대평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깡깡이 예술마을. 지역주민, 구청, 지역 문화단체,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하여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한다.

깡깡이 마을

해안가 대평북로를 따라간다. 버선등 쪽에 깡깡이 안내센터가 있다. 안전모를 착용하고 정박되어 있는 선박 내부를 둘러본다. 마을 해설사의 안내로 마을을 돌아보았다. 해설사는 깡깡이마을 투어를 100회를 넘게 진행하였다고 한다. 유람선 타고 남항 일대를 돌아볼 수도 있다. 옛 영도 도선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한 깡깡이 해상투어다. 깡깡이마을이 부산의 새로운 관광지로 떠올랐다.


다나카 조선소와 거리 박물관


일제강점기 때 지은 근대 건축물에서 볼트, 너트, 와이어로프, 엔진, 스크루, 냉동, 전기 등 각종 선박 부품을 만들고 수리하고 있다. 조선소의 활기찬 작업의 모습 등 다양한 종류의 공공예술 작품이 눈에 띈다. 국내외 작가와 단체가 그린 벽화다. 단조롭고 칙칙한 공장지대의 분위기를 밝게 바꾼다.

1887년 다나카 와카지로는 자갈치 해안에서 목선 제조업으로 출발하여 1912년 현재 대평초등학교 자리에 '다나카 조선소'를 설립한다. 대풍포 매축 후 현 우리조선(주)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 다나카 조선소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엔진을 장착한 목선을 만들었다. 다나카조선소는 사업자가 바뀌는 데 따라 회사명이 여섯 차례 바뀌면서 현재의 우리조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_ 깡깡이 예술마을 거리 박물관
다나카 조선소 터(위, 현 우리조선소), 나카무라 조선철공소 터(아래, 현 선진종합)

'다나카 조선소'를 찾아간다. 우리나라 최초로 엔진을 장착한 동력선을 만들었다. 목선이었다. 또 일본인의 기술로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 노동자의 손으로 처음 만든 근대식 선박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현재는 '우리조선소'다. 선박을 수리하는 모습을 견학한다. 작업 현장 가까이 갈 수는 없지만.


우리조선소 담장에 1890년 나룻배가 다니던 시절부터 해방 후 현재까지 깡깡이마을 조선소의 변천사를 알기 쉽게 표현한 그림과 설명이 게시되어 있다. 대평동 깡깡이예술마을 거리 박물관이다.

우리조선소부터 대평로, 대평남로(버선코)를 따라 주욱 늘어선 조선소들을 거쳐 대평 로터리로 나온다. 깡깡이 마을의 중심지다. 남항동 마을지기 사무소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적산가옥으로 추정된다. 시계 등 키트 조립 체험이 가능한 마을공작소을 겸하고 있다.

깡깡이예술마을 조형물(왼쪽), 깡깡이마을 공작소(오른쪽)

해방 후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평동에 있던 일본인 조선소를 불하받는다. 이를 토대로 자체적인 기술개발을 통해 깡깡이마을을 '70년대 수리조선업의 메카로 성장시켰다. 호황을 누리던 시절, 대평로터리는 마을의 중심지였다. 아직도 건재한 양다방 앞에 마을을 알리는 조형물이 서있다. 깡깡이마을 대평동은 '80년대에 들어 조선업의 부진과 함께 쇠락한다. 점점 인구가 감소하여 1998년 남항동으로 편입된다. 행정동명은 남항동이다.



깜찍한 변신


로터리에서 대평로를 따라 대동아파트 쪽으로 걷다가 한성세탁소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자그마한 쉼터가 있다.

쉼터

대부분의 건물은 여전히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예술가의 창의성이 반영된 작품이 마을 곳곳에 보인다. 벤치와 쉼터, 가로등이 기능성을 갖춘 시설과 예술작품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빛, 소리, 움직임, 색채 등 다양한 매체를 잘 활용하여 깡깡이마을의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조그마한 비닐하우스에 허브가 심겨 있다. 허브향까지 어우러진다.

골목에 설치된 구름 가로등은 '낮에는 파란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처럼 올려다보고, 밤에는 지긋이 감상할 수 있는 심미적인 치유의 역할과 재미난 상상력을 제공한다'라고 작가 허수빈은 작품을 설명한다. 태양광 발전 패널을 이용하여 밤 시간 공업지역 일대의 어두운 골목을 파랗게 밝힌다. 방범등의 기능과 함께, 적절한 조도로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장식용이 아닌 지역의 특성과 주민 편의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실핏줄같이 얽힌 골목이다. 왔던 길로 돌아 나오는 편이 길 찾기가 쉽다. 대평로 양쪽으로 전기, 기계, 조선 관련 업체들이 줄지어 있다. 현대 데크와 대호장갑 사잇길로 들어선다. 옛 대평유치원과 마을회관 건물을 개축한 깡깡이 생활문화센터가 있다. 이곳은 주민들의 사랑방이다. 마을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기억의 장소다. '서본원사'라는 일본 사찰을 주민들이 불하받아 마을회관과 유치원으로 활용하던 곳이다.

깡깡이마을 문화센터

1층 마을 다방은 마을 공동수익 창출 공간이다. 마을 주민이 직접 운영한다. 기념품도 판매하고 홀 대여도 가능하다.

2층은 마을의 근대 역사, 조선산업, 해양문화 자료를 전시하는 마을 박물관이다. 선박수리과정, 부품 제작 등을 기록한 영상물, 사진, 개인 소장품 등을 만나 볼 수 있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


생활문화센터에서 나와 대평태림아파트 쪽으로 간다. 이 앞에 물양장이 하나 더 있다. 물양장 앞의 센트럴마린과 토토골프연습장은 1935년 설립한 성냥공장이 있던 자리다.

다시 대평로를 걸어 대동대교맨션아파트 앞에서 건널목을 건넌다. 자리는 1909년 설립된 미국계 스탠더드 석유회사가 있던 곳이다.

대동대교맨션아파트 4동 벽면에 그려진 대형벽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탐방객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주민들의 추천을 받아 오랫동안 마을을 지키고 가꾸어온 부녀회장을 퍼블릭 아트 소재로 등장시키는 파격은 대평동 재생사업의 대미를 장식한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는 2017년 독일의 유명한 그라피티 작가가 '깡깡이 어머니'를 소재로 그린 깡깡이 마을의 상징이다.

올해 2월 영도구 한 문화단체가 공공미술 환기 목적으로 "영도 깡깡이마을 벽화 지워도 되겠습니까"라는 현수막으로 벽화를 덮었다가 주민 반발에 철거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공공미술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취지로, 관련된 토론회 소식을 알리려는 홍보 현수막이었지만 주민들이 오해할 수 있는 난해한 내용이었다. 현수막을 내건 단체는 운영상의 실수를 인정하고 이를 내리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입가에 깊이 파인 주름과 희끗희끗한 머리칼, 지워진 눈썹은 어려운 시절 고단한 삶을 살아온 '우리 시대의 어머니'를 그려내고 있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는 단순히 깡깡이마을의 어머니가 아니다. 자식을 위한, 가족을 위한 자신의 희생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지난 시대의 그리운 어머니다. 그런데 이를 덮었으니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 주민들이 반발한 것이다.


어머니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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