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 골목투어 2 (남항동, 영선동, 신선동)
영도 골목투어 둘째 날. 아침에 올라온 브런치북의 글을 읽다가 함지골 '아카시아 집'이 묘사된 대목에서 눈을 멈춘다.
영도 섬의 절벽 위에 있는 아카시아 집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그저 그만이었다. 소나무 숲을 관통하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우측 중간중간에 파라솔이 붙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고, 각 테이블 주변에는 싸리나무 울타리가 완벽한 칸막이 역할을 했다. 각 좌석은 서로 적당히 떨어져 있어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 한 옆 테이블에 들릴 염려도 없고ㆍ ㆍㆍㆍㆍㆍ절벽 위 숲 속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참으로 운치가 있었다. 왼쪽으로 끝없는 수평선이, 중간에는 자그마한 섬이, 오른쪽으로는 아기자기한 송도 섬과 해변의 불빛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_ 한우물 <보조기> 19화
아내와 나는 중매결혼을 했다. 처음 선을 본 후 몇 달간 소식이 없다가 당숙모님이 연결하여 다시 만났다. 인연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 만나서 간 곳이 '아카시아 집'이다. 그 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잊고 살았는데 아련한 추억을 한우물 님의 <보조기>가 일깨워 준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를 뒤로 하고 남항서로의 건널목을 건넌다. 일제강점기 시라이시 제염소가 있었던 블록이 나온다. 개항 이후 영도에는 재제염(거칠게 만든 천일염을 물에 녹여서 다시 곤 소금) 공장이 밀집해 있었다. 용호동에서 제염업자로 성공한 일본인 시라이시 우마타로가 1915년 시라이시 재제염 공장을 설립한 곳이다. 100년 전의 제염소 건물이 일부 남아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붉은 벽돌 건물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선박 의장품을 제작하는 '대성의장'이다.
이 골목에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두 개의 극장이 있었다. 영도 지역 최초의 에비스자 극장은 연극 전용관이다. 개관일과 폐관일, 주소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남항동 1가 98번지 일원으로 추정할 뿐이다.
두 번째는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1924년에 개관한 코토부기자 극장이다. 지금의 남항동 행정복지센터 옆의 한물씨너스오피스텔 자리에 있었다. 전차 종점 인근이라 한때 전성기가 있었던 극장이다. 해방 후에도 항구극장으로 45년간 영업을 하다가 폐관했다.
두 극장 터 사이에 있는 남성교회 자리가 1922년 설립된 부산제3금융조합이 있던 곳이다. 조합원을 상대로 예금과 대출을 하던 초기 단계의 금융기관이다.
남항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남항로를 따라 한 블록 더 간다. 남항동 사거리에 '영도전차종점기념비'가 서 있다. 기념비 건너편이 전차가 머물던 종점 위치다.
영도선(당시는 목도선) 전차는 1935년 2월에서 1967년 5월까지 운행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차 종점이 있던 남항동 사거리는 교통이 편한 영도의 중심지였다. 인근에 학교도 많았다. 전차에서 내려 등교하던 학생들의 등굣길을 따라간다. 절영로가 이어진다.
먼저 만나는 곳이 문현동으로 옮겨간 대양공고 터다. 지금은 부산멀티미디어지원센터와 영도도서관 남항분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바로 옆의 골목 안에 남중학교와 남고등학교가 있었다. 교복 소매에 백선 세 개를 달고 다니던 남중학교만 같은 자리에 남아 있다. 남고등학교는 청학동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동삼동의 옛 해양대 자리에 있다.
영도도서관 남항분관 건너 대평초등학교. 운동장 안쪽에 '한국 근대 조선 발상 유적지'라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1912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인 다나카 조선소가 있던 자리다. 대풍포 매립 후 지금의 우리조선 자리로 옮겨갔다.
영선교차로 앞에 선다. 전차에서 내린 남여상(지금의 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이 등교하던 길을 바라본다. 그때는 로터리 두 개를 거쳐 신선초등학교 쪽으로 올라갔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옛 아래 로터리다. 위 로터리는 지금도 그대로 있다. 이 길은 내가 중학교 때 당숙 집에 심부름을 다니던 길이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내려온 S대학을 다니던 당숙은 학교가 서울로 돌아가자 학업을 포기하고 신선동 판자촌으로 들어간다. 동네 끝이 신선초등학교다. 그 앞에 집을 지어 제면기를 놓고 국수를 뽑았다. 피란민들이 모여 만든 판자촌이고, 연이은 흉년으로 식량이 귀하던 때였다. 꽤 재미를 본 모양이다. 어린 내가 봐도 살림이 넉넉해 보였다. 용돈 얻는 재미로 심부름을 다녔다. 바라만 보고 반도보라아파트 쪽으로 간다.
2송도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는 보건고등학교(옛 금성여상, 영도여상, 한국테크노과학고등학교) 자리는 피란 시절 연희대(연세대 전신) 임시 교사가 있던 곳이다. 연세대가 서울로 돌아간 뒤에도 1960대 중반까지 연세초급대, 연세대 가정대학이 있었다. 그 후 경성대학교 전신인 한성여자실업초급대학도 잠시 여기에 있었다.
반도보라아파트 앞 절영해안산책로 관리사무소 건물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바닷가에 돛을 올린 요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여기서 시작하여 해안선을 따라 중리까지 약 3킬로미터의 산책로가 이어진다. 바다 건너 송도가 바라보인다. 옛부터 경치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웬만했으면 2송도라고 했겠는가. 6,70년대까지 자갈 해변에서 해수욕도 했다. 군사보호구역이라 접근이 어려웠던 가파르고 험난한 지역까지 개방된다. 2001년 절영해안산책로를 만들었다. 우리는 절영로를 따라 2송도삼거리 쪽으로 걷는다.
흰여울문화마을 안내소 앞에 관광객이 모여 있다. 안내원이 안내지도를 보며 관광 포인트를 설명한다. 맛집도 덧붙인다.
한국 전쟁 때 피란민들이 모여들었다. 해안 절벽에 루핑과 슬레이트로 움막을 짓고 임시 거처를 만들어 살면서 동네가 형성되었다. 조그만 집들이 모여 있는 소박한 마을이다. 아픈 역사와 힘들었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시간이 멈춘 공간이 아니다.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공간이다. 식수 때문에 싸우고 공동화장실 사용으로 아귀다툼을 하면서도 서로 도우며 살던 고단한 날의 기억이 향수로 승화된다.
넓은 바다를 마을의 앞마당처럼 품고 있는 흰여울길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웃고 울며 함께 놀던 정든 고향길을 생각나게 한다.
이 길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남포동 옛 시청 앞 버스 정류장에는 흰여울마을 가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특히 젊은이들이 많다.
마을 중간쯤에 영화 <변호인> 촬영지가 있다. 부림사건 피해자의 엄마인 국밥집주인 김영애가 절규하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니 변호사 맞제? 변호사님아, 니 내 쫌 도와도"
변호사 송강호가 아들 찾아 헤매는 엄마 김영애를 기다리던 대문 앞에 앉아 '부림사건'을 생각한다. 국밥집 아들의 실제 인물도, 엄마 역의 김영애도, 변호사의 실제 인물도 이제 모두 고인이 되었다.
다시 절영로로 올라와 함지골을 향해 조금 걸으니 작은 쉼터가 있다. 흰여울 마을에서 멀어지는 만큼 사람도 줄어든다. 점심 도시락을 먹는다. 흔들의자에 앉아 태평양으로 열린 바다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다. 송도해수욕장, 혈청소와 암남공원, 두도, 나무섬이 차례로 보인다. 작은 배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달린다. 큰 선박들이 같은 방향으로 멈춘 채 바다 위에 떠있다. 아래 절영산책로 자갈해안에는 파도가 밀려와서 부서진다. 포말이 일어난다.
함지골 사격장 건너편 길가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서 있다. 1963년부터 있던 '추억의 아카시아 집', 옛 분위기를 찾을 수 없다. 여기가 아카시아 집이 있던 곳인지 매점 주인에게 물어본다.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던 70대 아주머니가 대신 대답한다.
"이곳인데 없어진 지 오래됐어예. 길이 넓어지면서 도로와 공원 속으로 들어갔지요, 아마. 70년대에는 아카시아가 많았는데. "
느티나무는 있는데, 아카시아가 없다. 절벽 앞으로 펼쳐진 바다는 있는데, 소나무 사이의 오솔길과 희미한 백열등 밑의 파라솔 달린 탁자가 있던 '아카시아 집'은 없다. 달랑 간이매점 하나뿐이다
"1974년 새마을사업으로 도로가 생기고부터 여기 아카시아가 유명해졌지예. 아카시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쓰레기는 쌓이고 캐쌓는데. 아카시아 나무가 빠르게 자라 울창해지면서, 다른 나무 자라는 거를 방해한다꼬 다 베어버렸다 아입니꺼. 아카시아가 없어진 후에도 아카시아 집은 한참 동안 (영업을) 했어예."
"아주머니는 어떻게 아카시아 집을 그리 잘 압니꺼. 영선동에 살았는 갑지요."
"아이고. 그때 데이트 깨나 해본 사람은 다 압니더. 이 아카시아 집을."
나는 '데이트 깨나'하는 대목에서 웃음이 피식 나온다. 아내와 내가 다시 만나 결혼할 때까지의 3달간을 아내는 꼭 '우리가 연애할 때'라고 한다. 그 말이 생각나서 나온 웃음이다. 아카시아 집도 기억 못 하면서.
아주머니는 말을 이어간다.
"와 예, 아저씨도 데이트 좀 했는 갑네예."
아주머니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동안 매점 주인은 아무 말도 안 한다. '아카시아 집'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대답하기 귀찮은가 보다.
다시 절영로를 따라간다. 목장원 앞, 해안으로 튀어나온 조그만 광장에 정자가 있다. 1975년에 만들었다 하여 '75광장'이란다. 절영로를 걷는 길손이 쉬어가는 곳일 뿐만 아니라, 경직된 이름과 달리 풍광이 빼어나다.
중리 해변으로 내려가면 노을 전망대 앞에서 절영도해안산책로와 만난다. 그즈음에 남고등학교가 있다. 정문에서 봐도 후문에서 봐도 교정이 해송과 언덕에 가려 내부를 드러내지 않는다. 남고 바로 뒤의 체육고등학교는 남고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건물 높은 층에서 바라보는 중리 앞바다와 노을이 아름다운 교정, 가끔 들리는 뱃고동소리의 정겨움을 남겨두고, 2026년 명지국제시도시로 이전할 예정이다.
영도대교에서 시작한 영도 골목투어 1, 2(남항동, 영선동, 신선동)을 동삼동으로 살짝 넘어온 여기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