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영도대교를 넘는다. 도개식 영도대교 기념비 앞에서 봉래동물양장으로 내려간다. 여기도 낚시꾼들이 세월을 낚고 있다.
봉래동 물양장으로 들어서니 대형 벽화가 영도의 존재감을 알린다. 날씬하게 생긴 명마가 앞발을 치켜들고 있다. 영도는 옛부터 절영마로 유명하다. 말이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 절영마다.
《고려사》에 절영마 얘기가 나온다. 후삼국 때는 부산까지 후백제의 영향권에 들어 있었고 한다. 후백제 왕인 견원이 후삼국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다투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절영마 한 필을 선물했고 한다.
절영마를 키우는 영도는 목장의 섬, 목도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영도를 오가던 전차 노선을 목도선이라 했다.
영도대교를 건너면 대영 절영마 벽화가 맞이한다.
물양장을 U자로 둘러서 먼저 영도관광안내센터로 간다. 영도 안내 유인물과 지도를 구한다. 《영도 근대역사 흔적 지도 안내서》도 한 권 산다.
물양장 반대편에는 도로를 따라 선박과 물류 관련 업체들이 모여 있다. 어망, 엔진, 보트, 선박 인양, 수중 작업, 고속화물 등의 회사들이 줄지어 있다. 작고 낡은 건물들과 고층 건물이 함께 섞여 있다.
물양장을 따라 선박과 물류 관련 업체들이 모여 있다.
영도는 부산의 중심가에 인접해 있고 인구가 밀집해 있던 곳이다. 대부분의 부산 사람은 부산에서 가장 큰 섬으로 알고 있다. 사실은 가덕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개항 이전의 터를 잡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부산포는 조선시대 대일 방어상 군사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재침을 우려해 주민을 소개해 절영도는 무인도가 된다.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어 1601년 절영도왜관이 설치된 후에는 왜관이 있는 지역이라 적극적인 주민 이주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섬은 버려진다. 고기잡이를 하는 일부 주민들만 살았다. 전체가 100호 미만이었다.
1876년 개항 이후 14년이 지난 1890년이 돼서야 용미산 남쪽 기슭과 봉래 나루터 사이에 영도를 오가는 나룻배 두척이 생긴다. 봉래 나루터가 있던 봉래동, 대교동 일대를 나룻가 포구로 불렀다. 처음에는 돛이 없는 작은 거룻배로 노를 저어 섬과 육지를 오갔다. 뜻있는 영선동의 몇몇 사람이 각자의 형편에 따라 쌀이나 보리 몇 되를 내어 뱃사공의 품삯을 주었다.
영도관광안내소 근처가 옛날 봉래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대풍포 매축공사 때 매립되었다. 그 흔적이 상호로 남아 있다.
봉래나루의 흔적
나룻배는 통통배로 바뀌고
점차 영도로 이주하는 사람이 불어난다. 5년 후 나룻배는 4척이 된다. 인근 일본인 전관거류지에 살던 일본인 중에서도 어업에 뜻을 둔사람들이 영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인이 많아지면서 자갈치와 대평동 사이에도 뱃길이 생긴다. 일본인 나루터가 하나 더 생겼다.
점점 나룻배 이용객은 늘어난다. 1914년 나룻배는 동력선으로 바뀐다. 뱃삯도 현금으로 바뀐다. 통통거리며 중앙동과 봉래동, 자갈치와 대평동 사이로 오가는 동력선을 통통배라 했다.
봉래나루가 있는 봉래동 일대는 유동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지역이 되었다. 우리는좁은 골목을 통해 근대 상업거리로 들어간다. 지금도 상업거리다. 미곡상, 식육점, 중국집, 만두집, 이발소, 여관, 한의원, 전당포 등의 옛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바둑판처럼 골목이 나 있다. 바퀴 돌면 방향감각을 잃어버린다.
옛 목도유곽 거리
돌다가 작은 돌부처를 발견한다.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일본식 이층 건물들이 모여 있다. 아, 이곳이 목도유곽 거리구나.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는 돌부처다. 유곽 거리의 기구한 사연을 100년 넘게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옛 유곽 거리를 거쳐 봉래나루로를 따라 해안을 걷는다.
근대 항만 창고거리다. 대형 창고들이 봉래나루로를 따라 줄지어 있다. 보세창고들이다. '부산세관 대일 보세창고', '수협 식품류 검사 창고'가 보인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창고거리에 젊은이들의 통행량이많아진다. 길거리는 활기가 넘친다.
창고형 카페 거리로 변신하고 있다
낡은 창고를 리노베이션 한, 밝고 화사한 분위기의 카페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조선소, 창고 거리에 커피로 사람을 모은다.
창고형 카페 거리
'실제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날 것으로 느끼며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 한다'는 다소 당돌한 포부를 드러내는 모모스 커피. 북항의 풍경을 카페 내부로 끌어들인다. 창고 건물이라 층고가 높다. 보기에 시원하다. 카페 공간 안내도를 따라 카페를 둘러본다. 안내도 하단의 QR코드를 찍으면 오디오 가이드가 연결된다.
대선조선 앞의 선박을 수리하던 공장이 카페로 새로 태어난 곳. '포근한 온기, 소소한 것들을 통해 마음으로 공감한다'는 무명일기. 복합 문화공간이다. 밖에서 보면 놓치고 지나가기 쉽다. 바로 앞이 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조선소다. 나의 정서에는 맞지 않지만 반려동물을 동반하여 차를 마시는 장소도 있다.
봉래나루로는 대선조선으로 이어져 경남조선에서 끝난다.
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조선소 앞에 카페가 있다.
대선조선 앞에서 홈플러스를 거쳐 미광 마린타워 아파트로 간다.
1917년 설립된 조선 경질도자기회사가 있던 자리다. 조선의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바탕으로 도자기를 대량 생산하던 조선 제일의 도자기 공장이었다.
해방 후, 대한도기(주)가 이어받아 1972년까지 영업을 한다. 법랑을 만들던 회사다. 한국전쟁 때 피란 온 당대 최고의 동양화가 이당 김은호 화백이 이 회사의 제품에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대한불교 진각종 복전 심인당과 천주교 봉래성당이 담장을 맞대고 있는 골목으로 간다.
오양대교맨션 1층, 젬스톤. 물만 채우면 수영장이 될 공간이 카페로 새로 태어났다. 바닥의 파란 수영장 타일이 눈에 들어온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수영장을 재해석한 야심 찬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수영장을 재해석한 카페 젬스톤
봉래시장과 삼진어묵
봉래시장으로 간다. 봉래동 로터리 부근을 '고리장터'라 한다. 앞서 말한 '절영마'는 태종대와 봉래산 기슭의 국마장(國馬場)에 방목하였다. 매년 한, 두 번씩 조정에서 내려온 목자(牧者)가 말을 검사한다. 국가가 징발할 말을 고르는 작업이다. 쓸만한 말은 낙인을 찍는다. 둥근 고리 모양으로 말뚝이 쳐진 곳 안에 말들을 가두어 놓고 검사한다. '말을 검사하던, 말뚝이 쳐진 고리 모양의 장소'라고 하여 이 지역을 '고리장터'라 했다고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봉래시장은 1970년에 상가 건물을 짓고 2005년에 전통 시장으로 인정된다. 봉래시장만의 특화된 상품이 없지만, 인근의 삼진어묵과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봉래시장과 삼진어묵
한국전쟁 직전, 삼진어묵은 봉래시장 입구의 판잣집에서 상호 없이 어묵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한다. 피란민이 급증하여 봉래시장과 함께 호황을 누린다. 봉래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한 삼진어묵이 어묵업계의 대표 브랜드가 된다.
이제는 삼진어묵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삼진어묵과 봉래시장 인근의 낡은 건물들이 옷을 갈아입는다. 밀어버리고 새로 짓는 형식이 아니다. 골목이 활기를 띤다. 이곳에 영도 창업지원센터가 들어와 있다. 옛날을 기억하고 사람이 몰린다.
태종로로 빠져나온다. 소방서 앞 사거리에서 태종로를 건너영도초등학교로 올라간다.
영도초등학교
영도초등학교는 1909년 사립옥성학교로출발했다. 영도 거주 조선인 유지들이 설립한 학교다. 용미산 산기슭과 봉래나루를 오가던 나룻배는옥성재단의 수익용 재산이었다. 나룻배 수입으로 학교운영비를 충당했다.
1921년 사립옥성학교는 목도공립보통학교(현 영도초등학교)로 바뀐다. 옥성재단을 해산하고, 나룻배 운영권도 부산부로 넘어간다. 2008년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한 유서 깊은 학교다.
봉래나루는 변화하고 있다
태종로를 따라 소방서, 영도우체국, 대교파출소를 거쳐 대교동교차로에서 다시 봉래동 물양장으로 들어간다.
옛 향수를 느끼게 하는 815 다방 앞의 물양장 주변은 포장마차 거리가 된다. 해질녘이 되니 포장마차가 속속 들어와서 영업을 준비한다. 창고 거리 카페에 있던 젊은이들이 자리를 옮겨 앉는다. 영도의 새로운 명물 거리가 되었다.
봉래나루 130년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지금도 진행형이다.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그 결과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