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 문화가 숨 쉬는 동삼동

영도 골목투어 5 (청학동, 동삼동)

by 정순동

청학성당 앞에서


수변공원에서 청학시장으로 올라간다. 이팝나무의 하얀 꽃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내한성, 내공해성, 내염성 및 병충해에 강한 이팝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배가 고파 보릿고개를 넘기가 힘들었던 시절, 허기진 사람들의 눈에 하얗게 핀 이팝나무 꽃이 쌀밥처럼 보여 쌀나무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이팝나무는 영도구청까지 이어진다.

청학성당

청학성당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천주교는 1890년 경남지역 최초의 본당인 절영도성당을 영도에 설립한다. 초대 주임신부로 조조(Jozeau) 신부를 임명하였다. 1932년 청학성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개항기,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 한국전쟁,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영도지역 수산업, 조선업 발전과 궤를 같이하며 성장한다.

청학성당의 역사를 살펴본다. 부산교구의 발자취는 물론 근현대 부산의 역사를 함께 보여준다. 해방 전에는 섬이라는 폐쇄적인 지역특성 때문에 성당은 발전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피란민이 몰려들어 섬의 인구가 늘어난다. 전후 구호물자 배급은 종교활동을 활성화시킨다. 영도 지역의 신성성당, 봉래성당, 태종대성당이 여기서 분가된다.

1990년대 영도 지역은 수산업과 조선업이 쇠퇴하면서 역동성을 잃는다. 청학성당도 복음화에 어려움을 겪는다.



영도구청과 조내기 고구마


영도구청은 농청산 언덕 위의 전망 좋은 곳에 있다. 구청 마당에서 부산항을 바라본다. 멀리 동해와 남해의 경계를 짓는 오륙도가 옆으로 늘어섰다. 가까이 발 밑에는 울긋불긋한 조선소 지붕이 이어진다.

영도구청은 1957년 대교동 2가에서 영도출장소로 출발했다. 1988년 자치구로 승격하여 1994년 9월 청학동 신축 청사로 이전하였다.

영도구청에서 본 북항과 조선소(위), 농청산 언덕 위의 숲 앞이 영도구청이다.(아래)

부터 이 지역을 조내기 마을이라 불렀다. 1763년 10월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온다. 재배법과 함께 부산첨사 이응혁에게 보내어 봉래산 동쪽 해안지대 야산에 심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고구마 재배의 시초다.

'조엄이 가져온 고구마를 심은 지역'이라 하여 이 일대를 조내기라 한다.


영도 조내기 역사기념관을 찾아간다. 가는 길목에서 도시재생의 성공 사례를 본다. 조내기로와 와치로가 만나는 삼거리에 있던 신기산업이 카페로 변신했다. 발상이 독특하다. 제조업체의 산기산업 공장 건물을 카페로 꾸몄다. 부산항의 아름다운 야경을 조망하는 카페로 이름난 곳이다. 맞은편 신기숲과 함께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잠시 앉아 목을 축이고 간다.


봉래산을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 자리한 조내기 역사기념관은 전시실, 테마 카페, 요리 체험실, 교육장을 갖추고 있다. 영도가 고구마 시배지라는 역사적 사실을 알린다. 기념관 뒤편은 조내기 고구마 역사공원이다.

카폐 신기산업


광명고등학교와 이학수


광명고(光明高). 교명을 듣고 기독교계 학교가 아닌가 생각했다. 교명에 얽힌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0년 국권 피탈 후,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넌다. 중국 길림성 연변으로 이주한 애국지사들은 용정을 근거지로 항일 투쟁을 한다. 선각자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용정에 영신중학교를 세운다. 후에 광명중학교, 용정중학교로 이어졌다. 해방 후 귀국한 졸업생들은 광명중학교의 얼을 잇기를 열망한다. 이 학교 출신 고려원양 이학수 사장이 광명중학교(光明中學校)의 혼을 잇고자 광명고등학교(光明高等學校)를 설립하였다.

이학수 초대 이사장은 한국 근대인쇄문화의 산실이라 불리던 ‘광명인쇄소’를 운영하였다. 일제 말과 해방 직후, 조선은행권 등 화폐를 찍어내며 인쇄업계를 주름잡던 광명인쇄소는 5·16 군사쿠데타 당시 ‘혁명공약’을 인쇄하였다. 그 후 고려원양, 고려식품, 고려서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다가 극심한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광명고는 봉래산 자락에 있다. 영도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다. 경사마저 급한 곳이라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영도 외의 지역에서 배정되는 학생은 거의 없다. 인지도도 떨어진다. 지리적 여건에 비해 재단의 평판은 좋은 편이다. 비교적 근실한 사학으로 알려진 학교다. 인근의 부산남고등학교가 명지국제신도시로 이전하고 나면 섬 내에 유일한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가 된다. 학생 수가 점차 줄어들지만 폐교될 염려는 없다.



장승과 솟대 그리고 천리교


다시 영도구청으로 내려와 태종로를 따라 동삼동으로 넘어간다.

영도에는 배 타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 청학동과 동삼동에도 선원과 해녀들이 많았다. 앞바다는 황금어장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거센 파도와 싸우는 가족의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원하는 주민들은 종교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영도에는 절과 교회가 많다. 민간 신앙의 흔적도 많이 남아 있다.

부산의 얼굴인 오륙도와 아치섬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장승과 솟대가 서 있다. 장승과 솟대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해오던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으로 불리며 우리의 삶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다. 각박한 세상에 진정한 현대의 '벅수 되기'를 자처하는 이들이 그들의 '벅수 되기' 한마음이 널리 퍼져 나가기를 기원하며 세운 장승이다.

장승과 솟대(위), 대한천리교 원남성교회(아래)

동삼삼거리에 기와가 올려진 웅장한 대한천리교 원남성교회가 보인다. 거리를 마을 사람들은 천리교 삼거리라 한다. 1876년 부산항 개항과 함께, 천리교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래된다.

개항 이후 일본 정부는 대마도 주민에 한정하던 조선 도항 허가를 일본인 모두에게 가능하게 확대한다. 이 조치로 1892년에서 1893년 무렵 일본인 사토미 치타로(里見治太郞)가 부산에 와서 천리교 포교활동을 시작한다.

1904년 10월 포교의 거점을 마련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리교 포교소가 부산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부산에 이주한 일본인을 대상으로 포교하였다. 점차 조선의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된다. 일제는 조선의 고유 신앙과 전래의 풍속, 관습은 미신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대표적인 종교정책이 되었다.



동삼초등학교에서 두 선생을 생각한다


동삼로로 올라간다. 옛 경희어망 터인 일동미라주아파트를 거쳐 동삼초등학교로 내려간다.

동삼초등학교 교문 앞에 특별한 장식이나 문양이 없는 소박한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비석이 서 있다. 일제강점기 열악하였던 동삼동 지역의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한 박진두 선생의 비석이다. 선생은 학교부지를 희사하여 목도공립심상학교 동삼분교(현 동삼초등학교)를 열었다.

비석이 초라해 보였던가 보다. 오른쪽에 동삼초등학교 졸업생들이 건립한 송덕비가 하나 더 있다.

동삼동에는 각종 교육기관이 모여 있다. 비석을 보며 영도구 교육의 바탕을 생각한다.

동삼초등학교

또 한 사람의 선생을 생각한다.

군사독재정권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내걸고 참 교육의 기반을 만들려던 젊은 교사가 있었다. 전교조 결성 당시 부산지부 초등 지회장으로 동삼초등학교 분회를 결성한 이성림 선생.

'이성림은 빨갱이다.'

교장의 이 말에 절망하고 목숨을 끊은 아버지를 장지에 묻고도 형사를 피해야 했다. 이 선생은 부산구치소에 수감되고 해직된다. <나의 1989년, 그것은 운명이었다>는 글에서 그때를 담담히 회고하던 이 선생 생각에 숙연해진다.



동삼동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길 건너 매축지가 동삼 혁신지구다. 부산해양경찰청, 항만소방서, 부산항해상교통관제센터, 해양박물관, 해양수산개발원, 국제크루즈터미널 등 해양수산 관련 기관과 학교가 들어서면서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잔디구장에는 해사고등학교 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아치섬이라 불리는 조도는 영도 본섬과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다. 부산만 북항의 입구에 있는 해발 141미터의 아치산으로 형성된 섬 전체가 한국해양대학교 캠퍼스다.

'아침이 가장 먼저 오는 섬', 조도.《동래부지》(1740)에는 고지도(古智島) 또는 동백도(冬柏島)로 기록되어 있다. 태종대 남쪽에 있는 주전자섬은 무인도로 우리나라 지도 작성의 기점이다.

동삼 혁신지구(위), 국제크루즈터미널(아래)

해양대삼거리, 해양대학교 들어가는 길 입구에 동삼동 패총 전시관이 있다. 동삼동에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인 패총이 태종대 가는 길목에서 발견되었다.

1990년대까지는 주변이 민가와 경작지였다. 유적지의 보호 구역을 확대하여 정비하고 2002년 동삼동 패총 전시관을 열었다. 약 5천 년 전의 신석기시대 유물, 빗살무늬토기와 석기 등이 조개무덤 속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패총이다. 또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었다. 여러 시대의 문화층이 겹쳐 있음이 밝혀졌다. 아래층은 기원전 3천 년대, 중간은 기원전 2천 년대, 맨 위 층은 그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남부 해안 지역의 신석기 문화와 그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공간이 달라진다. 필요 없는 공간은 사라진다. 필요에 따라 새로운 공간이 생긴다. 동삼동의 생활환경은 또다시 변하고 있다. 해양대학교 들어가는 길 북쪽 건너편 해안을 매축하여 지도를 새로 그린다.

한국해양대학교와 동삼동 패총 전시관

섬 내를 연결하는 도로는 오늘 걸어온 태종로와 남쪽 함지골을 지나가는 절영로가 있다. 이제 남고등학교가 있는 중리로 넘어가면 절영로와 연결되어 영도를 한 바퀴 도는 셈이다. 걸어갈려니 살짝 꾀가 난다. 버스를 타려는데 방향을 모르겠다. 전시관 앞 정류장에서 해양대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에게 물어본다.


"남고로 갈려면 어디에서 버스를 타야 됩니까?"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한다.

"어떤 남고 말입니까?"


나는 눈치를 못 채고 다시 묻는다.

"부산남고등학교 가려는데 어디에서 버스를 탑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네?"


'남자'고등학교를 생각하는 것 같다. 아, 여기가 해양대학이지. 타지에서 유학 온 학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그제사 든다.

"부산사람이 아닙니까?"

젊은이는 짤막하게 대답한다.

"예"


카카오 맵으로 검색을 한다. 걸어서 25분 걸리는데, 버스로 28분 걸린다. 빙빙 돌아가는 모양이다. 내친김에 걸어간다.



부산 원도심 골목투어를 마치며


범일동에서 시작한 부산의 원도심 걷기를 영도 중리에서 마친다.

원도심의 쇠퇴는 제조업이나 전통시장 등의 쇠퇴로 이어진다. 지역의 생산시설이 도시외곽이나 해외로 이전하고, 도심의 기능은 크게 낙후된다.

영도는 거미줄 같이 얽혀 있는 좁은 골목의 낡은 집과 산 중턱까지 치솟은 고층아파트가 공존하고 있다. 소규모 철공소와 굴지의 조선소가 함께 있다. 폐공장과 창고를 리모델링하고 슬럼화되어 가는 피란민촌을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활기찬 거리로 만드는가 하면, 공유수면 매립으로 혁신도시를 만드는 사업을 함께 하고 있다.

영도의 좁은 골목을 사람들이 찾는다. 영도의 폐공장지대에 사람이 몰려든다. 버스에도 승객이 넘친다. 대규모 철거와 정비 형태로 이루어지는 도시개발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고민하고 있다. 도시재생의 과정에서 과거의 기억과 지역의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부산의 미래를 내다보는 축소판이 영도다. 영도가 안고 있는 고민이 늙어가는 부산의 고민이다.

영도의 도시재생뉴딜사업이 성공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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