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학초등학교 앞에서 버스를 내린다. 학교 뒤편 언덕배기가 '석탄고 마을'이다. 일본 해군 저탄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지금도 그리 부른다.
일본은 부산포 개항 이후 끊임없이 절영도를 주목한다. 봉학초등학교 뒤편 일대 4,900평을 1년 임대료 은화 20원에 조차하여 해군 저탄장으로 사용한다. 그러자 러시아도 절영도에 조차지를 요구한다. 러시아 군함 3척이 부산항에 나타나 무력시위도 하고.
봉학초등학교 건너편이 HJ중공업이다. 건널목에서 HJ중공업을 바라본다.
HJ중공업
중일전쟁 직전, 일제는 대륙 침략 전쟁 계획에 따라 조선을 군수산업 기지화한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미츠비시 중공업과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합작하여 조선중공업(주)를 설립한다. 조선중공업은 군함과 군수물자 수송선을 건조하며 빠르게 성장한다.
해방 후 대한조선공사가 된다. 이 회사는 1950년대 1,000톤급 이상의 대형 철선을 만드는 국내 굴지의 조선소로 부산 지역 및 한국 조선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 이후 한진중공업으로 민영화되어 노조탄압의 대표적 기업이란 오명을 안고 있다가, HJ중공업으로 바꿨다.
회사 정문과 마주 보는 곳에 노조 사무실이 있다.그 옆의추모공원이 있다. 박창수ㆍ김주익ㆍ곽재규 열사 합동 추모비가서 있다. 2005년 10월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원이 세운 비다.
추모공원
박창수 열사. 1981년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한다. 10년간 근무한 그는 1990년 한진중공업노동조합 위원장과 부산지역노동조합연합(부산노련) 부의장이 된다. 이듬해 2월 대우조선 파업을 지원하기 위한 연대회의에 참여하였다. 이를 이유로 구속되었다가 5월 6일 의문사한다.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김주익 열사. 2002년 한진중공업은 노사합의를 깨고 600여 명의 노동자를 정리 해고한다. 동시에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민형사 소송을 제기한다. 노조 간부 110명에 18억 원의 손해배상 가압류를 건다. 노조원 14명에 대해 고소ㆍ고발과 26명에 대해 징계위 회부 등으로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한다. 이 시기에도 한진중공업은 거액의 당기 순이익을 내고 많은 배당금을 챙긴다. 김주익은 이 어려운 시기에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된다.
회사 측은 더욱 고삐를 죈다. 손해배상 가압류로 조합비가 압류된다. 노조간부는 지친다. 노조원들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2003년 6월 폭우가 쏟아지던 날 새벽, 35m 상공의 ‘85호 크레인’에 올라가서절박한 호소를 한다.
나의 무덤은 85호 크레인이다.
회사와 경찰은 이를 무시한다. 회사는 교섭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경찰은 공권력 투입으로 응수한다.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129일째 되는 날, 김주익은 마지막 선택을 한다.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맨다.
박창수ㆍ김주익ㆍ곽재규 열사 합동 추모비
곽재규 열사. 1975년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하여 노조 간부를 지낸 곽재규는 김주익의 자살로 엄청난 충격과 자괴감에 빠진다. "내가 주익이를 죽였다"며 자책하고절규한다. 김주익이 죽은 지 보름째 되는 날, 그는 김주익의 시신이 있던 85호 크레인 맞은편 독(독) 위에서 뛰어내려 앞서간 동지의 뒤를 따른다.
졸지에 두 명의 동료를 잃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투쟁은 다시 힘차게 전개된다. 민주노총이 두 차례 전국적인 총파업을 한다. 전교조와 공무원노조도 동참한다. 회사 측의 비정한 태도와 공권력의 과잉 대응으로 여론이 돌아선다. 회사와 정부도 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된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노사 합의에 이르게 된다.
1986년 이후 누적된 해고자10명이 복직되었다. 한진중공업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정리 해고도 철회되고 임금 인상과 유가족 보상도 합의된다. 하지만 김진숙은 복직 명단에서 제외된다.
소금꽃나무 김진숙, 복직하다
2022년 2월 25일김진숙이 출근한다.
1986년 노조활동을 이유로 해고된 지 37년 만이다. 이날, HJ중공업 '단결의 광장'에서 소금꽃나무 김진숙의 복직 행사가 열렸다. 대한조선공사가 해직시키고 한진중공업이 거부하던 김진숙의 복직이 HJ중공업으로 바뀌고서야 이루어졌다.
한진중공업 고공 크레인
용접공으로 돌아온 김진숙은 새로운 회사 HJ중공업 경영진들에게 당부한다.
"단 한 명도 자르지 마십시오. 어느 누구도 울게 하지 마십시오. 하청 노동자들 차별하지 마시고 다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 이 복직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정년이 지난 김진숙은 "신념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굴종할 수 없어 끝내 버텼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이념이 굳세서가 아니라 함께 일하고 같은 꿈을 꾸었던 동지들의 상여를 메고 울었던 그 눈물을 배반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이었음을 기억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복직한 날 퇴직한다. HJ중공업대표로부터 받은 꽃다발과 메달을 들고.
김진숙의 노조활동을 어떻게 짧은 글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준 '309일간의 고공농성'을 살펴보자.
한진중공업은 2002년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10년 12월 15일, 경영 악화를 이유로 생산직 노동자 400명을 희망퇴직시키기로 결정한다. 노조는 반발한다. '정리해고 전면 철회'를 주장한다.
김진숙은 2011년 1월 6일부터 한진중공업 내의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에 들어간다. 2011년 11월 10일까지 309일간 고공농성과 사회 각층의 희망버스 연대투쟁을 통해 해고자 전원 복직의 노사 합의를 이끌어 낸다. 고난 속에서도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청학수변공원
청학 수변공원으로 간다. 자원봉사자 10여 명이 주변 청소를 하고 있다. 노인들이 벤치에 앉아 한가롭게 쉬고 있다.
85호 크레인 고공농성이 종료된 것을 기념하는 마지막 희망버스 행사를 이곳에서 했다.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김진숙을 응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던곳이다. 집회 참여자들이 탄 희망버스는 5차례 왔다.
야만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 앞에 더 교묘하게 계획된 야만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뒤 맛이 개운하지 않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주장하니 그게 공정이냐고 한다. '비정규직을 최소화하자'라고 하니, '비정규직 일자리마저 없어진다'라고 프레임을 건다. 사용자와 대등하게 협상할 노동조합을 겨우 만드니 강성노조란다.조직을 유지하기도 벅찬데. 임금협상 요구하면 귀족노조란다. 탄압해도 굴복하지 않으면 빨갱이라고 매도한다. 이념 공세에도 흔들림이 없으면 '또라이'라는 한마디로 무시해 버린다.
북항대교
인간으로서 초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는 아직도 먼 나라 이야기인가. 눈앞의 북항대교가 휘감아 돌며 앞으로 나간다. 현기증이 난다. 분명 역사는 진보하는데 돌고 돌면서 나아간다. 어지러움을 넘어 두려움이 생긴다. 후진할 길이 없다. 아직도 얼마나 더 고생을 해야 할는지.
힘들면 쉬어가지. 미련하게 억지로 걷고 그래. 아내는 벌써 해변에 앉아 있다. 북항을 둘러본다. 오륙도를 찾는다. 앞에 떠 있는 배가 시야를 가린다. 역동적인 북항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북항의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쉰다. 격앙됐던 마음을 가라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