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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 유배길에서 잃어버린 마을로

올레18길(상), 제주 원도심과 사라봉ㆍ별도봉 산책길

by 정순동


올레18길은 제주시 도심 한복판의 성안 유배길을 걸으며 시작된다. 동문시장에서 제주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본다. 사라봉과 별도봉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에서 제주항과 제주 시가지를 조망한다. 4.3 당시, 마을 전체가 불태워져 잃어버린 곤을동 마을 터와 수용소였던 옛 주정공장 터에서 제주의 아픈 상처를 되새긴다.


후반부는 바닷가로 나가 제주의 관문이었던 화북포구, 조천포구를 지나간다. 시비코지에서 닭모루ㆍ대섬으로 이어지는 바당길과 용천수 탐방길을 걷는다.


성안 유배길을 걷다.


관덕정, 제주읍성이 있는 동문시장 근처는 조선시대 많은 인물들이 유배되어 귀양살이 한 곳이 있다. 그래서 이 일대를 '성안 유배길'이라 부르고 있다.


중앙로를 따라 걷기 시작하여 7, 8분 떨어진 제민신협 본점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이곳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선정을 베풀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공납 부담을 덜어 주었던 광해군이 기득권 세력에 밀려나 유배되었던 곳이다.


광해군은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하도록 해 백성들이 주위에서 쉽게 약재를 구할 수 있도록 하고, 명ㆍ청 사이의 중립 외교로 평화와 실리를 챙겼던 개혁 군주였다.


역사적인 장소에 광해군이 귀양살이하던 곳을 알리는 '광해군 적소터'라는 표지석 하나만 남아 있다. 이 표지석은 그 후 하멜이 표착했을 때 수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고 적고 있다.

광해군 적소터

발걸음은 규림서원으로 간다. 기묘사화로 1519년 이곳에 귀양 와서 많은 시문을 남기고 이듬해 사사(賜死)된 형조판서 김정을 추모하여 건립한 서원으로 시작하여 다섯 현인을 배향한 곳이다. 이곳은 '광해군 적소터'와는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규림서원

옆에 오현단 (五賢壇)이 있다. 오현단은 조선시대 제주에 이바지한 다섯 현인의 위패를 모신 규림서원의 옛터에 조성한 제단으로 제주도 기념물 제1호다. 5현은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 송시열 등 다섯 분이다

오현단

동문시장 입구 남수교 근처에 충암 김정의 유배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김정은 순창군수·도승지·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지낸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조광조와 함께 대표적인 사림파다. 김정은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의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한다. 기묘사화 때 금산,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사된다.

동문시장 인근의 김정(좌), 이세직(우) 유배지 표지석

또 동문시장 인근 농협중앙회 제주시지부 앞에 구한말 김옥균 암살에 참여했던 이세직의 유배지 '사마제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채소 노점상의 좌판 뒤에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래도 찾는 사람이 더러 있는가 보다. 앞에서 표지석을 살피니 노점상 주인아주머니는 사진 찍으라고 고개를 돌린다.


동문시장으로 들어간다. 한참 둘러보다가 김진구의 유배지를 어렵게 찾는다. 동문시장 쉼터의 대각선 맞은편, 과일가게 바구니들이 유배지 표지석을 가리고 있다.

동문시장 쉼터 건너편 금복국수 간판 뒤에 김진구 유배지 표지석이 있다.

김진구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인경왕후의 오빠며, 숙종의 처남이다. 광성 부원군 김만기의 아들이고 서포 김만중의 조카이다. 노론의 핵심인물로 남인의 탄핵을 받고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한다. 훗날 아들 춘택과 손자 덕재도 이곳에 유배되었다.


김만덕 기념관과 객주터


신지천 옆의 신지로를 따라가다가 용진교 조금 못 미쳐서, 조선 후기 거상이자 의녀로 이름을 떨친 김만덕(1739~1812)의 기념관이 있다.


김만덕은 1795년 제주도에 흉년이 들자 뭍에서 쌀 500 섬을 들여와 제주도민을 구휼한다. 만덕의 선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조가 상을 내리려 하자, 만덕은 사양한다. 크게 감명을 받은 정조이 소원을 묻자, 만덕은 '대궐 구경과 금강산 유람'이라고 답한다. 정조는 만덕을 입궐시켜 '의녀반수'의 벼슬을 내리고, 금강산 유람도 허락한다.

김반덕은 1795년 제주도에 흉년이 들자 뭍에서 쌀 500 섬을 들여와 제주도민을 구휼한다.

김만덕의 묘소는 사라봉 모충사에 있다. 김만덕의 묘비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묘비명은 '행수내의녀김만덕지묘(行首內醫女金萬德之墓)'로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의 관행과 다르게 비문에 그의 이름 석 자와 직함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김만덕 상(좌), 김만덕 묘비(복제품, 우)

올레길은 인근의 '김만덕 객주터'로 이어간다. 제주시는 김만덕의 나눔과 상생의 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고,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김만덕 객주터'를 제주항 인근에 재현해 놓았다.

김만덕 객주터

최근 의녀(義女) 김만덕을 추모하기 위한 '김만덕 객주터'가 당초 취지와는 달리 술 파는 주막으로 변질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



4.3의 상처가 남은 곳


4.3 당시 민간인 수용소.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 맞은편, 현대아파트 옆의 공터에 4.3 유적지가 있다. 해방 전후, 고구마 전분으로 주정을 생산하던 제주 주정공장 옛터다. 이곳은 4.3 당시 난을 피해 입산했던 민간인을 수용했던 곳이다. 여기에 수용되었던 민간인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집단 학살되었다.

4.3 당시 민간인 수용소였던 제주 주정공장 터

사라봉 기슭으로 올라간다.

'칠머리당' 표지석을 만난다. 칠머리당 영등굿을 하던 곳이다. 칠머리당 영등굿은 바다의 평온과 풍작 및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음력 2월에 올리는 제주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이다.

칠머리당 터

건입포 칠머리에 칠머리당이 있었단다. 앞에서 언급한 옛 주정공장을 만들면서 절벽이 깎여져 항만청 부근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이곳에 신석을 모시고 굿은 문화재 전수관에서 치르고 있다고 한다.

건입동 벽화길

'바람 따라 걷는 건입동 벽화길'을 따라 해발고도 148m의 측화산 사라봉을 오른다. 이 오름에서 바라보는 해넘이는 영주12경의 2경인 사봉낙조(紗峰落照)로 꼽힌다.


사라봉 등산로 들머리에 일제동굴진지가 있다. 제주의 두 비행장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제주 사라봉 일제 동굴진지' 8곳 중 하나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가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았던 침략의 역사를 동굴 진지는 증명하고 있다.

사라봉 일제 동굴진지(등록문화재 제306호)

사라봉은 제주의 관문인 제주항을 내려다보고 있다.

뱃길을 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제주와 수인사를 나누는 곳이 사라봉이다. 동쪽이라는 순우리말 '사라'를 사용하여 사라봉이라 했다는 설과 해 질 무렵 붉은 낙조가 비단을 펼쳐놓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별도봉 산책길에서 본 제주항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었다. 북쪽의 망망대해도, 남쪽의 웅장한 한라산도, 발 밑으로 보이는 제주시의 시가지도, 아름다운 제주항도 모두 안갯속에 파 묻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사라봉 정상에 있는 사라봉수는 동쪽으로 원당봉수와 별도연대, 서쪽으로 도두봉수와 교신하였다.

사라봉수

올레18길은 별도봉 산책길로 이어진다. 동백나무, 벚꽃나무가 많이 심긴 길이다. 야자매트와 목재데크가 깔려 걷기 좋다. 싱그러운 초록의 향연에 눈이 시원하다.

애기업은돌(좌), 별도봉 산책길(우)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별도봉을 내려서자 곤을동 4.3 유적지가 있다. 화북천을 건너 곤을동 마을터로 들어간다.

곤을동 4.3유적지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은 제주시 화북1동 서쪽 바닷가에 있던 마을이다. 1949년 1월 4일과 5일 양일간에 국방경비대 군인들이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여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이 된 곤을동이다. 지금도 집터, 올레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4.3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다.

옛 곤을동 마을 조감도(위)와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의 현재 모습(아래)

노부부가 동네를 둘러보고 나온다.

학살의 후예들이 아직도 현란한 혀놀림으로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올레18길(하)에서 이야기를 이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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