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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Sep 04. 2022

너븐숭이의 기억

올레19길(중), 북촌 너븐숭이 4.3 기념관

너븐숭이 4.3 유적지는 1947.1. 17 북촌리 주민 400여 명이 학살된 장소 중 한 곳이다. 또 4.3의 아픔을 주제로 쓴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곳에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

기념관을 들어서니 평화·염원 펼침터가 있다. 소원을 담은 형형색색의 쪽지가 게시되어 있다.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젖먹이를 그린 시화가 그날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젖먹이> 강요배 작


북촌리에서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말라고 살려달라고

애원성 보다 빠른 속도로 이미

발사된 총탄은 어김없이 산 목숨에 꽂혀

죽음의 길을 재촉한다


시체 산 피 바다


수백의 죽음 속에서

살아남은 이의 내일은

또 다른 죽음


울음도 나오지 않는

원한이 사무쳐 구천에 가득할 때

젖먹이 하나 어미 피 젖 빨며

자지러지게 울고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도 모두 죽으리라


<젖먹이> 강요배 작





나는 그동안 소설 몇 권 읽고 4ㆍ3을 이해하려고 했다. 아니 어쩌면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현장에 와서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잊고 산 것이 부끄럽다. 내 글을 쓰는 것보다 기념관의 전시물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제주 4ㆍ3 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 4. 3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 9. 21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 4ㆍ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사건의 발단이 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은 항쟁의 성격을 띠고 전개된다. 하지만 이후 토벌대의 진압 과정은 집단학살이다.



1949년 1월 17일 발생한 북촌리 주민 대학살의 진상을 살펴보자.


발단

1949. 1, 17 북촌리에서 가장 비극적인 세칭 '북촌 사건'이 일어난다. 이날 아침 세화리에 주둔하던 일부 병력이 함덕의 대대본부로 이동하다가 너븐숭이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는다. 군인 두 명이 숨진다. 보초를 서던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들것에 싣고 본부로 간다. 흥분한 군인들은 명령을 받고 시신을 운구한 마을 원로 아홉 명 중 경찰 가족 1명만 남기고 모두 사살한다.


전개

이날 오전 11시 2 연대 3대대 병력은 북촌리에 들이닥친다. 군부대는 마을을 포위한다. 1000여 명에 이르는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온 마을을 불태운다.


현장 지휘관은 민보단(1948년 5·10 총선거 때 조직되어 1950년 봄까지, 경찰의 하부 지원 조직으로 활동한 우익단체) 책임자를 '마을 보초를 잘 못 섰다'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 앞에서 즉결 처분한다. 이어 군경 가족을 제외한 모든 주민을 사살한다.


대학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십 명 단위로 끌고 나간다. 학교 정문에서, 학교 인근 ‘당팟(밭)’에서, ‘너븐숭이(넓은 쉼터)’에서 주민들을 사살하기 시작한다. 광란의 북촌리 학살은 이튿날까지 이어진다. 이때 희생된 주민만 400여 명이 넘는다. 집단 학살은 대대장의 중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어지는 학살

대대장은 주민들을 함덕으로 강제 소개시킨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함덕으로 간 사람과 산으로 피신한 사람, 둘로 나뉜다.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함덕으로 갔던 주민들 가운데 100명 가까이는 '빨갱이 가족 색출 작전'에 휘말려 다시 희생된다.


또 하나의 학살

이날 북촌리에서 집단 학살극을 벌인 군인들은 옆 마을인 동북리 '굴왓'에 들러 주민들 86명을 집단 학살했다.


아이고 사건

6년 후, 억울한 죽음을 당한 영혼들을 위한 묵념을 올리다가 설움에 복받친 주민들이 대성통곡한 것을 경찰이 문제 삼기도 했다.


결말

이 사건으로 북촌마을은 후손이 끊긴 집안이 적지 않았다. 그 후 북촌리 주민들은 이 사건에 대해 말을 할 수 없었다. 침묵과 금기, 왜곡의 역사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4.3은 제주공동체에 엄청난 상흔을 남기고,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앓게 하였다. 이에 대한 치유는 물론이고 왜곡되고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첫 단계인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설 '순이 삼촌'이 발표된다.

아무도 말 못 하던 시절인 유신정권 말기(1978년)에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발표되면서 북촌리 대학살에 대한 침묵의 금기는 깨어졌다.


진상규명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4.3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어나고, 마을 원로회를 중심으로 희생자 조사에 나선다.


민주 정부가 들어서자, 2,000년 4.3 특별법이 제정되고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이 시작된다.


2001년 2월에는 4.3 때 북천초교가 폐교되어 학업을 중단했던 주민들이 반세기가 지나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대통령의 사과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정부를 대표하여 제주도민과 유가족들에게 사과한다. 2006년 4월 3일 4.3 위령제에 참석하여 분향하고 추도사를 한다.

"우는 것에조차 죄를 묻던 시절이 가고 이젠 대성통곡을 해도 괜찮은 시절이 됐네. '4.3은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 학살'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사죄를 듣고 우리는 긴 세월 가슴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뒀던 울음을 꺼내어 소리 없이 울었어. "

"울었죠. 우리 모두 텔레비전 앞에서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죠."

김창생 장편소설 <바람 목소리> 218쪽 ~ 219쪽, 봄, 2022. 4. 3


그 후 정부는 '너븐숭이'일대에 위령비, 기념관, 문학기념비 등을 마련하고, 유족회는 매년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2012년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너븐숭이를 방문하여 위령비에 헌화하고 묵념을 올린다. 평화와 상생의 새 역사로 나아갈 것을 약속한다.


국가 보상

문재인 정부는 제주 4.3 사건 희생자에 대한 국가 보상금 지급 기준을 마련한다. 구체적인 보상금 지급 기준과 신청 절차 등을 결정하여, 2022년 6월부터 생존 희생자를 시작으로 접수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희생자 이외도 내년 상반기 중 제8차 희생자·유족 신고를 진행할 계획이다.


뒤틀린 가족 관계도 바로잡는다. 제주도에 따르면 4·3 희생자 자녀가 친아버지 호적에 오르지 않고 큰아버지, 심지어 할아버지 등 다른 사람 호적에 등재된 경우가 다수 존재한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이 보상을 통해서 우리 공동체가 ‘과거의 잘못은 언젠가 분명히 밝혀지고, 진상 규명과 그 책임을 이행함으로써 화해와 상생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또 한쪽으로 희생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두 살, 세 살인 유아들의 명단도 보인다. 이름이 없이 '○○○자'로 기재되어 있다.


국가보상금 지급 기준이 마련되어 보상 절차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보상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들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겠는가. 아직도 학살 책임자에 대한 단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가, 어떤 세력이 이를 막고 있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자.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그날의 비극을 기억하자.


분하고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여, 부디 평화와 상생의 꽃으로 피어나소서.


4.3에 대한 동영상을 시청하고 기념관을 나와 너븐숭이 유적지를 시작으로 북촌마을 4.3길 탐방에 나선다.


올레19길(하)에서 이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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