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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Sep 21. 2022

육지 속의 섬, 청령포

영월 1

영월은 강원도 치악산과 태백산 사이의 깊은 골짜기로 흐르는 남한강 상류를 따라 형성된 한적한 산골 마을이다. 고씨동굴로 유명하고 영화 '라디오 스타'의 주무대이며 '가을로'촬영지가 이곳에 있다. 근래에 와서는 단종 유적지와 김삿갓을 스토리텔링 하여 영월을 알리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조용한 산골 마을인 이 고장이 조선조 초기 일어난 엄청난 정치적 사건의 현장이 된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유배되어 죽음에 이른 영월은 '단종의 고장'이라 할 만큼 곳곳에 단종과 관련된 유적지가 있다. 1455년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5살의 어린 나이에 상왕으로 물러 앉는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움직임(1456년)이 있은 다음 해인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 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다.



육지 속의 섬, 청령포


맑을 淸(청), 물 맑을 泠(령), 물가 浦(포)의 청령포(명승 제50호). 슬프고 억울한 단종 애사를 안고 있는 이곳은 얄미울 정도로 물이 맑고 풍광이 수려하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찾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리게 한다.

서강이 마치 뱀이 기어가듯 굽이쳐 흐른다. 물의 흐름이 느린 안쪽은 모래와 자갈이 퇴적되고 흐름이 빠른 바깥쪽은 강 주변이 점점 깎여 나가 사행천(蛇行川)이 발달한 곳이다.


청령포는 동·북·서쪽의 3면은 서강(西江)이 굽이쳐 흐르고 있고, 태백선이 지나가는 남쪽 한 면 만 칼처럼 날카로운 산에 연결되어 있다. 몹시 험준한 바위가 겹겹으로 쌓인 낭떠러지로 막혀 있어 반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섬이나 다름없는 천연 감옥 같은 지형이다.

나룻배는 수시로 다닌다. 강이 감아도는 안쪽, 모래톱의 자갈밭에 배가 닿는다. 모래톱에서 솔숲으로 들어가는 길은 벽시계에 매달린 시계추 모양을 하고 있다.



천연의 숲, 단종대왕 유배길 종점


강가의 너른 자갈밭을 지나면 잡초가 우거진 넓은 풀밭이 나오고, 풀밭을 지나면 양수림인 소나무 숲이 나온다.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한 지 7일째 되는1457년 윤 628일(음력) 단종과 그의 호송 행렬은 이곳 솔밭에 도착한다.

솔밭에는 훤칠한 키에 시원하게 가지를 뻗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가지 사이로 파고드는 햇빛을 받은 적송의 붉은 줄기가 아름다움을 더한다. 솔숲 아래는 말채나무, 진달래, 생강나무 등의 관목들이 함께 자라고 있어 생물군집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땅바닥으로 달개비, 깨풀, 돌나물, 산박하 등의 들풀들이 자라고 있다.

산림청은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잘 생긴 적송들이 울창한 청령포 수림지를  2004년 '천년의 숲'으로 지정하였다.


또 영월군은 솔치재에서 시작되는 '단종대왕 유배길'의 마지막 구간을 '인륜의 길'이라고 정하고 '앞은 강이요 뒤는 절벽뿐이나 그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 가슴이 아픈' 청령포를 종점으로 삼았다.



단종 어소

솔밭으로 들어서면 초가집 한 채와 기와집 한 채가 나란히 있다. 단종이 유배되어 귀양살이하던 집이다. 원래의 단종 어소는 단종이 사망한 후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 이내 허물어져 폐허가 되었고, 300년 후에 세워진 '단묘재본부시유지비'만 남아 있었다. 지금의 단종 어소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그 당시의 모습으로 2004년 4월 복원하여 단종의 유배생활을 재현하고 있다.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

문이 없는 어소 마당을 들어선다. 단묘유적비가 세워진 비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영조는 1763년(영조 39년)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 단종이 이곳에 계셨던 옛 터)’라는 글씨를 써서 내렸고, 이것을 화강석 비좌 위에 올려진 오석의 비신에 새겼다. 비(碑)의 뒷면에는 '영조 39년 계미년 가을에 울면서 받들어 쓰고, 어명에 의해 원주 감영이 이 비를 세웠다. 지명은 청령포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

단종이 귀양살이하던 집을 돌아보고 호젓한 솔밭을 걷는다. 탐방하기 좋게 나무 덱으로 산책로를 조성하여 놓았다. 담장 너머로 솔밭으로 둘러싸인 어소를 다시 살펴본다. 돌아서니 풍채가 빼어나서 놓치고 지나갈 수 없는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키가 30m이고, 수령이 600여 년이나 된 노송이다. 나무 둘레에 나지막한 울타리가 쳐져 있고, 사진 찍을 사람들이 관음송 안내문을 읽으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볼 관(觀), 소리 음(音)의 관음송(觀音松). 단종이 유배 온 것을 보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은 소나무라 해서 관음송이라 불린다. 단종의 서리서리 얽힌 한을 설화로 품고 있는 나무다. 단종은 (유배 당시의 수령이 60년으로 추정되는) 이 소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걸터앉아 시름을 달래었다고 전해진다.


망향탑

관음송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탐방로 계단을 따라 서측 능선을 오른다. 능선에는 노산대와 망향탑이 위치하고 있다. 단종은 층암절벽 위의 노산대를 오르내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시 단종의 생각이 기록으로 남은 것은 없지만 아마 인간적 고뇌가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돌탑이 길 옆에 서 있다. 후세 사람들은 한양에 두고 온 왕비를 간절히 생각하며 흩어져 있는 돌을 모아서 하나하나 쌓아 올렸을 것으로 추측하여 이 돌탑을 망향탑이라 한다. 단종이 유배지에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노산대

발길은 노산대에 이른다. 탐방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소나무는 점점 사라지고 활엽수가 숲을 차지하고 있다. 음수림으로 덮인 절벽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서강을 바라본다. 평창강과 주천강이 관란정 인근에서 합류하여 굽이쳐 흘러든 서강이 이제는 동강과 만나기 위해 휘감아 돈다. 영월 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 중의 명소다.


'노산대'란 명칭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해질 무렵이면 이곳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금표비

노산대에서 내려와 다시 솔밭을 왼쪽으로 돌아서 선착장이 있는 모래톱으로 간다. 길목에서 금표비를 만난다. 영조 2년(1726)에 세운 비석이다.  앞면에 '청령포 금표', 뒷면에는 '동서로 300척(90.9m) 남북으로 490척(148m)과, 이후 진흙이 쌓여 생긴 곳도 (출입을) 금지한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는 단종 유배지를 사적지로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종 복권의 분위기가 감지되는 내용이다.

또 금표비에서 정한 출입금지 영역 범위는 유배 온 단종이 활동할 수 있는 행동반경이었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단종은 암벽과 강으로 둘러싸인 천연 감옥과 같은 적막한 곳에 외부와 격리된 채 귀양살이를 했다.


두 달만에 끝난 청령포 생활

그러나 적막강산인 청령포에 단종이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유배 온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 큰  홍수가 난다.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는 물에 잠긴다. 이 물난리로 단종의 유배지는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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