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순동 Sep 23. 2022

고운 님 여의옵고 / 관풍헌, 자규루

영월 2

청령포 교차로를 지나 영월 읍내로 들어간다. 군청, 교육청, 공설운동장, 도서관, 경찰서, 농협, 우체국 등이 모여 있다. 영월초등학교가 있는 좁은 길, '이야기가 있어 걷고 싶은 거리'를 통과한다. 이 지역이 영월읍의 다운타운으로 안성기와 박중훈이 열연한 영화 '라디오 스타'의 주무대다. 사거리 모퉁이에 촬영장소인 청록다방이 있다. 최근에는 가수 백지영의 자매가 JTBC 해방타운에 출연하여 쌍화차를 마신 다방이기도 하다. 그 대각선 맞은편이 관풍헌이다.

영화 '라디오 스타' 촬영지, 영월읍 청록다방


단종의 새로운 거처, 관풍헌

갑작스러운 물난리로 단종은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 귀양살이를 이어간다. 관풍헌은 영월 관아의 객사로 태조 7년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옛 관청 건물이 없어진 넓은 빈터에 세 채의 객사 건물만 길게 늘어서 있다.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해방 후에는 영월중학교가 사용하기도 했는데 1997~1998년에 전면 보수하였다.

영월부 관아(보물 제1536호 월중도 중 제7폭 부치도)
관풍헌. 보덕유치원의 임시 원사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단종의 원찰인 보덕사 약사전이 가운데 있고, 오른쪽 관풍헌 건물과 왼쪽 객사 건물은 보덕사 부설 보덕유치원의 임시 원사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 손녀만 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서 아내의 옷자락을 잡고 '누구 엄마예요, 누구 찾아왔어요'하며 말을 건다. 아내는 웃으며 귀여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 몇 살이니'하고 묻는다.



단종의 혼이 서린 자규루

관풍헌 빈터 앞 쪽의 대로변 모퉁이에 있는 2층 누각이 자규루(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6호)다. 이 누각은 세종 10년(1428)에 지어졌으나 선조 36년(1605) 큰 홍수로 무너져내려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200년 가까이 지난 후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옛 터를 찾아 복원한 것이다. 현재는 펜스에 둘러싸여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자규루

본래는 매죽루라 부르던 곳인데 단종이 동헌 누각에 올라 자규시를 지은 뒤로부터 자규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와서

짝 없는 외로운 그림자로 푸른 숲에 깃들었다.

밤이면 밤마다 잠들려 하지만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원한은 끝나지 않네


두견이 울음 끊긴 새벽 묏부리에 조각달만 밝은데

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붉은 꽃(두견화)이 지네

하늘이 귀머거린가 애끓는 이 하소연 듣지 못하고

어이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가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窮恨年年恨不窮 (궁한연년한불궁)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何乃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총)


단종 지음, 1457년 자규루에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비운의 어린 임금 단종은 비통함과 애처로움이 배어 있는 시를 읊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세조의 공포정치와 단종의 죽음

'하늘이 귀머거린가 애끓는 이 하소연 듣지 못하고' 하면서 세상을 원망했지만 민심은 그렇게 무심하지만은 않았다. 단종 복위의 여론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예나 지금이나 정통성 없는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공포정치다. 정적을 제거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나에게 도전하는 자의 말로는 이렇다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 주듯 무자비한 숙청을 이어간다.


관풍헌으로 옮겨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단종을 최후로 몰아넣는 일이 발생한다. 영월에서 멀지 않은 영주로 유배된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참수된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봉된다.


그러나 단종이 자규루에 오르는 것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계속되는 복위 운동의 불씨를 없애자는 정인지, 한명회 등의 진언으로 세조는 단종을 처형하기로 결심한다.


세조의 명을 받아 사약을 갖고 간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사형을 집행한 당시의 상황은 한참 뒤에 쓰여진 '숙종실록'의 기록으로 살펴볼 수 있다.


단종대왕이 영월에 계실 적에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좀처럼 들어가지 못하다가 마침내 입시했을 때 단종대왕께서는 관복을 갖추고 마루로 나오시어 온 이유를 하문하셨으나, 왕방연은 차마 대답을 못했다고 한다.

'숙종실록' 25년 1월 2일 자


전해지는 말로는 왕방연이 머뭇거리자, 단종을 모시던 자가 활시위로 단종의 목을 조였다고도 하고, 단종이 관졸의 활을 빼앗아 스스로 목을 조였다고도 한다. 어떤 경우든 세조가 사약을 내린 것은 사실이고 이로 인해 단종은 유배 온 지 4개월 만인 1457년 10월 24일 유시(음력)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단종의 나이 17세 되던 해였다.



세조실록의 왜곡

그런데 단종의 죽음에 대해 세조실록은 '송현수(단종의 장인)가 교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매어서 죽어, 예를 갖춰 장사를 지냈다'라고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태조(1392년)부터 철종(1863년)까지 25대에 걸친 472년간 왕조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에 따라 연대순으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매우 엄격한 규율에 따라 기록, 관리되었다. 실록은 반드시 해당 왕의 사후에 작성하고, 왕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록을 열람할 수 없도록 하여 사관의 독립성과 비밀성을 보장하였다. 사소한 일까지도 사실의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작성할 수 있도록 사관에게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세조실록의 왜곡된 기록을 어떻게 봐야 할까.

사관이 계유정난 후 이어지는 공포정치에 두려움을 느껴 사관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렸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세조의 심복으로 단종의 죽음을 후세에 사실대로 전하고 싶지 않아서 왜곡된 기록을 하였을 수도 있겠다. 어떤 경우든 극히 드문 예다.



왕방연 시조비, 고운 임 여의옵고

청령포 건너편 언덕 위, (청령포 1교와 2교 두 다리 사이의) 솔밭에  '고운 임 여의옵고' 시조비가 세워져 있다.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잘 알려진 시조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왕방연 지음
왕방연 시조비, 고운 님 여의옵고

비 뒷면에는 '이곳은 1457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시조를 읊었던 곳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역시 다른 설도 있다. 왕방연이 영월에 온 것은 사형집행자로서가 아니라 단종을 청령포로 호송할 때 왔다는 설이다. 시조의 내용도 임금을 유배지에 두고 가는 편치 않은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어느 게 진실일지라고 자괴감에 시달리는 금부도사의 착잡한 심정이 잘 녹아 있는 애달픈 시조다. 공포에 입을 다물고 있던 당시 사람들은 은유적으로 표현한 '고운 님 여의옵고'에 공감하고 이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였다. 아마 마음속에 있던 억압된 공포의 응어리를 노랫말을 통하여 외부로 뱉어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오늘날도 자신들의 권력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해 이해관계 세력들이 똘똘 뭉쳐 정적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시대를 넘어 심금을 울리는 이 비를 찾아 위로를 받는다. (2022. 9. 1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