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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Sep 27. 2022

영월 장릉

영월 3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잇따른 충신들의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영월로 유배된 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다. 사약을 받은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진다. 이를 거두는 자도 삼족을 멸한다는 야만적인 어명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러한 엄혹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 준 이가 있다. 영월 호장인 엄홍도와 그의 아들들이 눈 덮인 동을지산에 올라 노루가 앉았던 자리에 시신을 묻었다고 전해진다.


방치되다시피 하던 단종의 무덤은 중종 11년(1516) 암장지를 찾아 봉분을 갖추고, 선조 13년(1580) 석물을 세우고 능역을 조성하여 관리를 시작하였다. 숙종 24년(1698)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무덤도 '장릉'으로 격상된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후 240년이 지나서 종묘 영녕전에 위패가 모셔져 조선의 제6대 왕의 폐위를 둘러싼 과거사 문제가 완전히 종결된다.



장릉의 능묘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모셔진 장릉은 서울에서 100리 안에 조성되어야 하는 왕릉의 능묘 규정과는 달리 영월에 조성되어 이곳의 대표적 문화유산이 되었다. 2008년에는 다른 조선 왕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능침은 '추존 왕릉 제도에 따라 행하라'라는 교지에 의해 정릉의 예를 따랐다.

장릉

뒤로 곡장을 두르고, 정면에는 정명등을 배치했다. 봉분을 형성한 흙과 사초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막는 기능을 하는 병풍석과 봉분 둘레를 장식하는 난간 모양의 난간석은 세우지 않았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도 한 쌍만 조성하였다. 그밖에 망주석, 문석인, 석마 등은 작게 조성하였으며, 무석인은 생략하고 망주석에는 세호(細虎)가 없어 다른 왕릉에 비해 다소 간결하다.


능침은 장릉 정문 앞, 단종역사관 옆의 계단을 이용하여 능선을 따라가면 산자락 가파른 곳에 있다. 따라서 제향 공간을 능의 측면 아래쪽 평지에 별도로 조성되었다. 능침과 제향 시설이 일직선으로 둘 수 있는 공간이 없어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신로와 어로)는 'ㄱ'자로 꺾여 있어 독특하다. 왼쪽은 신(선대왕의 영혼)만이 다니는 길인 신로고, 오른쪽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인데 초헌관이나 제관들이 다니는 길이다. 답사 온 일반인은 이 길을 이용하면 된다.

정자각

정자각은 능에 제향을 올리는 정(丁) 자 모양으로 지은 제각으로 제향을 올릴 때 선대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뒷문이 능침을 향해 열려 있다. 건물의 동쪽에 있는 두 개의 계단 중 3단의 높은 계단은 ‘신계(神階)’로, 선대 왕의 영혼이 이곳을 지나 정자각 뒤편 문을 통해 봉분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2단의 낮은 계단은  ‘어계(御階)’로, 왕이나 제관이 제례를 올리기 위해 이용하던 계단이다. 서쪽 계단은 왕 또는 제관이 제례를 끝마친 뒤 이용한다.



능침에서 제향 공간을 내려다본다.

장를 제향 공간

동쪽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으로 붉은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 놓았다.


홍살문 오른쪽에 있는 수복실은 능과 경내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으로 영조 9년(1733)에 세운 건물이다.

위 왼쪽부터 시계 침 도는 방향으로 홍살문, 단종 비각, 보호수, 영천

정자각 동쪽의 단종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 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서쪽에는 제향을 지낼 때 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이 마주 보고 있다. 남쪽 정면에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데 사용하는 우물인 영천과 수령 370년이 된 보호수 느릅나무가 서 있다.

 


정령송

장릉 능침으로 올라가는 길 옆에 '정령송(精靈松)'이라고 이름 지어진 소나무가 서 있다.

장릉 능침 가는 길(좌), 정령송(우)

정순왕후 송 씨는 15 때 한 살 아래인 단종의 비가 된다. 그 후 3년 만인 18세 때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 가는 단종과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에서 생이별을 한다. 그것이 단종과의 마지막이었다. 자신도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궁에서 쫓겨나, 친정마저 풍비박산 난 상태에서 다시 관비로 전락한다.


82세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막을 짓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곳에 '자주동천'이라는 샘터가 있다.


한 많은 삶을 산 정순황후는 눈조차 쉽게 감지 못 하였던 것 같다. 단종이 죽고도 정순왕후는 64년을 더 살았다.


그의 장례는 단종 복권의 분위기가 돌던 중종 때라 군부인의 격에 따라 치러진다.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혜주 정 씨 문중(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 시댁)의 선산에 매장된다. 그 후 단종과 함께 왕후로 복위되어 종묘에 배향되어 능호는 사릉(思陵)으로 불리게 된다. 이는 억울한 죽음을 한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1999년 4월 남양주 문화원은 '단종과 정순왕후의 영혼이라도 함께 했으면 하는 뜻'으로 사릉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를 이곳, 장릉 오르는 산자락에 옮겨 심었다.



장판옥

능침에서 내려오는 나무 덱으로 조성된 계단 밑에 '장판옥'이란 건물이 있다. 이곳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이름을 빽빽하게 적은 긴 판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장판옥 맞은편에는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이 있다.

장판옥. 이 건물은 정조 15년(1791)에 건립한 것으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44인, 여인위 6인 등 268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배식단.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위, 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단종제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정려각과 낙촌비각

이뿐만 아니라 장릉의 진입공간에는 재실 외에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한 건조물들이 있다. 장릉 입구에는 노산군 묘를 찾아 제를 올린 영월 군수 박충원의 기적비를 모신 낙촌비각(駱村碑閣), 재실을 지나면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정려각
낙촌비각

비운의 왕이었기에 단종과 관련된 설화도 많다.


엄흥도가 단종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산으로 올라 노루가 앉았다가 떠난 자리에 시신을 묻었다는데, 훗날 여러 지관들이 노루가 점지해 준 터 보다 더 좋은 명당자리를 찾지 못해 협소한 채로 왕릉을 조성하였다는 장릉과 노루에 얽힌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공원이 있다.


영월군의 단종에 대한 애정은 눈물겹다. 장릉 인근에 노루 조각공원을 조성하여 휴식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공원을 둘러보고 소나기재로 발걸음을 옮긴다. (202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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