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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Oct 05. 2022

간밤에 우던 여울 / 관란정

제천

한반도면 신천리 청송회관 앞 삼거리에서 제천 쪽으로 어간다. 한 3km 정도 가다가 조그만 고개를 넘으면 왼편에 관란정 입구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관란정은 생육신 중의 한 분인 원호가 거처하던 곳에 세운 정자다.


안쪽으로 나지막하게 세워져 있어 신천리에서 제천 쪽으로 가면서는 놓치기 쉽다. 차를 몇 대 댈 수 있는 주차선이 그어진 곳이다. 여기서 제법 가파른 언덕을 400m 정도 치고 올라간다. 별 찾는 이가 없어 보이는데 차가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시멘트 포장길이 나 있다. 솔밭을 지나면 서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이다. 언덕배기에 관란정과 유허비각이 세워져 있다.



사육신과 생육신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1455년 마침내 허울뿐인 나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마저 찬탈하고 스스로 보위에 올라 세조가 된다. 이에 반발해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는 단종 복위를 계획하지만 사전에 누설된다. 1456년 6월, 이들은 세조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 모두 처형된다. 남효온은 '추강집'에서 이들 여섯 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고 칭했다.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른 김시습과 남효온, 성담수, 원호, 이맹전, 조여는 세조가 즉위하자 왕위 찬탈을 비난하고, 스스로 관직을 내놓거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생육신(生六臣)이라 불린다. 김시습은 한양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살았고, 원호는 단종이 폐위되자 칭병사직하고 원주로 낙향하여 은거한다.



원호와 관란정

원호는 1423년(세종 5) 식년 문과에 급제한 뒤,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원호는 단종을 찾아뵙고 아예 영월 서쪽(제천시 송학면 장곡리)으로 거처를 옮긴다. 관란정은 장곡리와 한반도면 신천리, 옹정리의 경계 지역으로 주천강과 평창강이 만나서 서강이 되는 곳에 있다. 서강은 굽이쳐 단종 유배지 청량포로 흘러간다. 이곳 언덕 위에 초가를 짓고 볼 觀 자 물결 瀾 자, 관란재(觀瀾齋)라 하였는데 '관란'이란 원호의 호로 '물결을 보다'는 뜻이다.

서강가에 단을 세우고 단종을 그리면서 아침·저녁으로 눈물을 흘리며 동쪽(영월)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단종이 죽자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지낸 후, 고향 원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였다. 세조가 호조참의에 임명해 불렀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평생 단종을 사모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1845년(헌종 11) 원호의 충절을 기리려는 후손과 유학자들이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정자를 마련하고 ‘관란정’이라 하였다. 1941년, 1970년, 1987년에 개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호의 유허비, 탄세사

정자 옆에 원호의 유허비(遺墟碑)도 함께 서 있다. 단종의 억울함에 분노한 원호는 '세상이 모두 의리를 잊고 실리를 따른다 해도 나는 백이숙제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탄세사(세상을 탄식하는 노래)를 읊었다.

이 탄세사를 내용으로 영·정조 때 대학자 홍양호유허비를 세웠다. 비문은 붉은색 글씨로 새겨져 있으며 자연석을 기초석으로 하여 비석을 세웠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허 비각은 목조 기와 맞배지붕이다.



간밤에 우던 여울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단종을 지키지 못한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원호의 시조비가 영월을 향해 서 있다.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신념을 지키려던 당대 지식인의 고뇌를 상기시킨다.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 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물어 거슬러 흐르고자 나도 울어 보내도다.

사모진 원한의 장강 토목 베노나.
갈대꽃과 단풍은 차가워서 우수수 분명 날리라.
이곳은 귀양 온 곳 달밤에 혼백은 어디에서 노는고.

<출전 청구영언, 작가 생육신 원호>


제천으로 살짝 넘어왔던 발걸음을 다시 영월로 돌려 주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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