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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Oct 19. 2022

유서 깊은 요선정

영월 7

요선암의 독특한 경관과 주천강과 법흥천·엄둔천의 맑고 깊은 계곡을 갖춘 무릉리는 여름이면 계곡축제, 가을에는 사재강 문화제가 열려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숙종 어제시와 요선정


이 무릉리 강가의 절벽 위에 유서 깊은 정자가 앉아 있다. 이곳은 백년계곡 안쪽의 큰 절 법흥사에 딸린 작은 암자가 있었던 곳으로 절은 없어지고 고려시대의 마애불과 오층석탑이 남아 있다. 1913년 지역 주민들이 이 빈 절터에 정자를 세우고 숙종·영조·정조 세 임금의 어제시(御製詩)를 봉안하였는데, '신선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닌 요선정(邀仙亭)이다. 이 지역에 더해진 또 하나의 신비로운 이름이다.

요선정

하나의 정자에 세 임금의 어제어필시문(御製御筆詩文)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는 사연은 이러하다. 숙종은 조선조 초기에 벌어진 세조의 왕위 찬탈 과거사를 바로잡으려 노력한다. 1698년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하고 종묘에 모시는 한편 노산묘를 왕릉으로 격상하여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이를 위해 숙종이 단종의 영월 유배길에 관한 소상한 일들을 물어 살폈다고 한다.  


<요선정의 숙종 어제시 현판> 소실된 숙종의 어제시를 영조가 복원하고 그 내력을 함께 써서 건 새 현판

이 과정에 주천강을 사이에 두고 ‘청허루’와 ‘빙허루’가 마주 보고 서 있다는 것을 듣고, 1720년 정월 주천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빙허, 청허양루시(憑虛, 晴虛兩樓詩) 한수를 써서 내리니 당시 원주목사 심정보는 이를 청허루에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청허루에 걸려있던 숙종의 어제시 현판은 청허루 화재로 누대와 함께 소실된다.


1758년 강원감사인 임집(林鏶)이 청허루를 중건하자 영조는 숙종의 어제시를 손수 쓰고, 그 뒤에 자신의 시 한수를 덧붙여 임집에게 내린다. 그리하여 새로 중건된 청허루에는 두 임금의 어제시를 봉안하게 된다.

<요선정의 정조 어제시 현판>

그 후 30년이 지난 1788년 다시 정조는 청허루에 봉안된 두 분 선왕의 어제시의 가치를 일깨우고 이를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당부하는 취지의 서문 '경취주천현루소봉 서(敬吹酒泉縣樓所奉 序)'와 함께 이에 부치는 시를 지어 두 분 선왕의 어제시 옆에 걸게 한다


세 임금의 시와 글이 새겨진 현판이 산골 정자에 걸리게 된 연유는 이러하나 두 누각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퇴락하여 조선 말기에 허물어지고, 세 임금의 글을 새긴 현판은 일본인의 소유가 된다. 이를 마을 주민 김병위가 거금을 주고 1909년 환수하여 보관하게 된다.


그 후 1913년, 요선계(이 마을 이ㆍ원ㆍ곽 3성의 친목계)가 중심이 되어 요선정을 짓고 어제어필시문을 두 틀 편액에 봉안한다. 하나에는 숙종 어제시와 영조 어제어필시가 담겨 있고, 다른 하나에는 정조가 쓴 서문과 어제시를 담고 있다.


단종을 복위하는 과정에 쓴 시에 자연의 아름다움만 노래하고 단종애사에 대한 함의가 없어 아쉬운 면이 있으나, 세조 역시 선왕이라 단종의 억울함을 언급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얼룩진 과거사를 바로 세우는 힘든 일을 한 숙종이 단종의 유배길의 산천을 읊은 시를 짓고, 영조와 정조가 이의 보존에 힘을 기울여온 점만으로도 단종에 대한 연민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면 나의 지나친 해석일까?


<요선정 중수기>

요선정은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뿐만 아니라 일본인 손에 들어갔던 문화유산을 민간이 나서서 찾아 보존하게 된 뜻깊은 정자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정자의 정면에는 요선계 이응호가 쓴 '요선정'과 '모성헌(慕聖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정자 안에는 이 유서 깊은 정자와 어제시들의 내력을 증언하는 홍상한의 '청허루 중건기' '요선정기' '요선정 중수기'도 함께 하고 있다.



바위에 음각된 마애불좌상


영월군 수주면 도원운학로 13-39에 위치한 요선정(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은 원래 작은 암자가 있던 곳이라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지금도 정자 옆 큰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 놓은 3.5m 높이의 마애여래좌상과 무너진 오층석탑 1기가 남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된 마애불의 얼굴은 양각으로 새겨져 있으나 목 아랫부분은 음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애불이 서 있는 듯하지만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좌상이다. 양각의 양감이 풍부한 얼굴에 음각으로 새긴 몸체가 조화롭지 못하고 상하체의 인체 비례도 맞지 않아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잃었으나 힘찬 기상이 엿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옆에 있는 청석탑과 함께 고려 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릉리 마애여래좌상(좌,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 오층석탑(우)

미술평론가 유홍준이 "무릉리 마애불은 얼굴이 귀엽고 원만하기 때문에 차라리 몸체를 표현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라고 혹평한 마애불을 보고 시인 신경림은 시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 차디찬 강물에 /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라고 노래한다.


신경림의 시 '주천강가의 마애불, 주천에서'를 읽고 다시 마애불을 살펴본다. 복주머니 모양의 큰 바위에 유독 얼굴만 돋을새김 된 마애불의 모습을 보니, 조심스럽게 살짝 몸을 비틀어바위를 빠져나오는 듯하다. 시인의 상상력에 "와아!" 하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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