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순동 Oct 24. 2022

오대산에 피어난 기록의 꽃, 조선왕조실록

평창 1


나를 찾아 떠나는 선재길


오대산은 한반도 북쪽 끝의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중심에 있다. 유·불·선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전통 신앙과 무속 신앙을 함께 품고 있는 성스러운 산이다.


오대산 천년 숲은 천사백여 년 전 자장율사가 산문을 여신 후, 석가모니불 진신사리를 모신 중대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오대 암자(남대 지장암, 동대 관음암, 서대 염불암, 북대 미륵암)를 이어 왔던 고승들의 발자취는 '나를 찾아 떠나는 선재길'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대산 자연명상마을에서 시작되는 선재길은 왕조실록·의궤 박물관을 먼저 만난다.


조선왕조실록이란?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은 우리나라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제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는 과정을 사관이 적은 사초를 기초로 생산한 공식적인 정부 기록이다. 전 왕조에 걸친 정교하고 방대한 기록인 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철종 이후의 고종과 순종의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쓰여 왜곡된 부분이 있고, 신빙성이 의심스러워 국보로 선정하지 않았다.


실록은 발간하고 나면 4대 사고에 분산하여 보관·관리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만 남고 모두 소실된다.  

<오대산 사고>1606년(선조 39)에 건립된 오대산 사고는 한국전쟁 때 아군에 의해 불에 타서 없어졌고, 지금의 건물은 복원한 것이다. 사진 출처 : 성보 박물관
<참봉 교지> 이 교지는 1880년 오대산사고 담당 참봉으로 김문표라는 사람을 임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 출처 : 월정사 왕조실록·의궤 박물관

일제에 약탈된 실록


1606년(선조 39), 실록은 남아 있었던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선조 이후의 정본과 함께 오대산, 묘향산, 태백산 등 접근이 어려운 곳에 새 외사고를 건립해 봉안하게 된다. 1917년 도쿄제국대학 시라토리 구라키치 교수는 조선총독부 데라우치 총독에게 실록 이관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반출 허가를 받아 실록 오대산사고본을 도쿄대학으로 옮겨간다.


실록 오대산사고본은 교정쇄본이다. 실록 출판 과정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 불법 반출된 실록 오대산사고본은 민간의 끈질긴 노력으로 2006년 마침내 국내로 들여온 소중한 기록 유산이다.

<성종실록> 사진 출처 : 월정사 왕조실록·의궤 박물관

실록 반환운동


실록 오대산사고본을 일본에서 되찾아 온 경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 팟캐스트 야단법석을 통해 혜문 스님의 주장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혜문 스님이 실록 반환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우연한 일에서 비롯된다. 2004년 봉선사는 관할 사찰의 재산에 대한 정기적인 일제 조사를 한다. 그 조사관이 된 혜문 스님은 '저승사자가 말을 끌고 오는 장면'을 그린 탱화 도난 사건을 밝혀내어 잃어버린 탱화를 찾아온다. 그러나 그 도난 사건에 조계종 유력자가 연루되어 있어 혜문 스님은 괘씸죄로 공경에 처하게 되어 교토로 피신하게 된다.


혜문 스님은 교토에서 일본어도 배우고 고서적도 보고 도서관도 다니며 소일하던 어느 날 헌책방에서 '청구사초'라는 책을 발견한다. 청구사초는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이야기였다. 1960대에 쓴 책인데 도쿄대 서고에 실록 오대산사고본이 보관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혜문 스님은 저자가 책표지에 쓴 '(책 내용에) 잘 못된 점이 있으면 바로잡아 달라'라는 겸손한 학자의 글을 보고,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있는 잘 못된 역사적 현실을 바로잡기로 결심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혜문 스님은 실록이 왜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지를 조사하게 된다. 오대산 월정사 사지에 실록의 반출 경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1984년, 1988년 도쿄대학 귀중서고에 가서 실록 오대산본의 실체를 확인하고 책을 쓴 계명문화대학 배현숙 교수를 만나 관련 자료를 넘겨받아 반환운동이 촉발된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처음 일본이 가져간 실록은 760책이었다. 대출된 70여 책을 제외한 나머지는 관동대지진 때 다 타 버린다. 그 후 일본은 27책을 당시의 경성제대로 이관하여 도쿄대와 분산하여 관리한다. 혜문스님은 도쿄대 교수들이 적은 책에 실록이 도쿄대 서고를 들고난 경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다.


관동대지진 때 모두 소실되었다고 생각한 실록 오대산사고본의 약탈 경위와 존재 여부에 대한 문헌적 증거를 확보한 후, 2005년 12월 30일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이하 환수위 / 공동의장 정념 스님·철안 스님, 자문위원장 김원웅 의원 )를 구성한다. 2006년 2월 16일 MBC 데스크에서 '월정사 정념 스님, 봉선사 철안 스님이 공동의장을 맡고 실록 반환운동을 시작한다'라는 첫 보도가 나간다.


소장을 준비하고 변호사를 선임하려 애를 쓰지만 변호사들이 도쿄대와의 소송을 꺼려하여 선임에 난항을 겪는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 국적자인 김순식 변호사와 그의 친구를 선임한다. 김순식 변호사는 소송이라기보다도 승패를 떠나서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수임한다며, 오히려 '괜찮겠냐'라며 환수위를 걱정했다고 한다. 자기들(조총련)을 만나고 한국에 가서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며.


'개 지옥 사건'에 밀린 '비운의 조선실록'


2006년 3월 3일 불교역사 기념관에서 환수위 출범식을 하고, 일본대사관과 도쿄대를 찾아간다. MBC는 3월 12일 시사매거진 2580에서 '비운의 조선실록'이란 제목으로 기획 방송을 한다. 방송이 나가면 반환운동의 열기가 고조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뜻밖의 일로 실망한다. '비운의 조선실록, 어떻게 풀어야 될지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하는 마지막 멘트로 방송이 끝나자, '멍 멍 멍'하는 개소리가 찬물을 끼얹는다. 하필이면 다음 꼭지가 '장수동 개 지옥 사건'이었다. 인천 장수동 개장수가 개 사육장 이전을 위한 땅 보상금이 적다고 개를 굶겨 죽이는 비참한 현장을 고발한 프로그램에 시청자의 관심이 쏠렸다. 네티즌들의 댓글이 수만 개가 달린다. '비운의 조선실록'에는 관심이 없고 '장수동 개 지옥 사건'에 시선을 돌리는 여론에 속이 상한 혜문 스님은 이런 댓글의 단다.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우리나라의 국보다. 이게 어떻게 개 지옥에 밀릴 수가 있는가"


그러자 빗발치는 악성 댓글들이 더욱 스님의 가슴을 후빈다.


"야, 실록은 죽은 물건이고 개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생명이 중요하지 지금 실록이 중요하냐"


민(民)이 나선 실록 반환 협상


1차 협상. 우여곡절 끝에 3월 15일 도쿄대학과 1차 협상을 하게 된다. 봉선사 혜문 스님과 노회찬 민노당 의원 등 환수위 위원 다섯 명은 도쿄대학을 방문해 일본이 과거 불법으로 강탈한 실록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도쿄대학 방문 조선왕조실록 반환요청서 전달 모습, 사진 출처 : 월정사 왕조실록·의궤 박물관

이날 도쿄대가 47책의 실록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공식 확인한다. 도쿄대 측은 반환 여부에 대한  의사 표명 기한(4월 17일)을 약속한다. 예상치 못한 성과를 올리지만 국내 보수언론은 이를 폄훼한다. 그뿐 아니라 MBC의 긍정적인 보도도 또다시 개 지옥 사건에 덮여 버린다. 바로 그날 네티즌들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장수동 개 사육장을 습격하여 개들을 탈출시키는 일이 발생한다. 대부분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난다.


나름대로 엄청난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1차 협상 때부터 사람들의 외면, 언론의 외면과 악의적인 보도, 정부의 무관심으로 혜문 스님을 비롯한 환수위원들은 마음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2차 협상. 도쿄대 측은 자신들의 학교가 재단으로 변경된 후(도쿄대는 그 해 3월 국립에서 법인으로 변경) 재산처리규정이 마련되지 않았다며 시간을 좀 달라는 요구를 한다. 수위는 5월 31일까지 시간을 주면서 마지막 협상임을 강조한다. 반환을 거부하면 도교 지방법원에 반환 소송을 할 것이란 통보를 한 셈이다.


국내로 돌아와서 국회의 협조를 요청한다. 30여 명의 국회의원들의 동의를 받는다. 대한민국 국회의 반환요구서를 도교대로 발송한다. 재일 거류민단도 힘을 보탠다. 도쿄대는 이사회를 열어 이 문제를 의논한다. 환수위는 내심 좋은 결과를 기대했다. 그러나 막상 3차 협상일에는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만 함께 가게 된다. 지방선거일이었기 때문이다. 환수위 대표는 3차 협상을 위해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KBS 기자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전화를 받는다.


"지금 서울대 정운찬 총장이 자신들이 실록을 찾아왔다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요. 이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약탈 문화재 '기증'으로 돌아오다.


5월 12일 도쿄대 이사회는 실록을 기증 방식으로 돌려줄 것을 결정한다. 도쿄대는 서울대를 방문하여 기증받을 수 있는지 의사를 타진한다. 5월 31일 3차 협상장에서 '서울대에 기증한다'라는 발표 하겠다고 서울대에서 받아 줄 것을 제안한다. 발표할 때까지 외부에 알리지 말 것을 조건으로. 그런데 서울대가 약속을 어기고 3차 협상 하루 전날 전격 발표해 버린 것이다.


3차 협상. 3차 협상에서 만난 도쿄대 박물관장은 화가 잔뜩 나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우리 측 협상단이 미안할 정도였다고 혜문 스님은 말한다. 도쿄대 박물관장은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협상단에게 정중하게 사과한다. 상의 여지도 없이 '서울대 기증'으로 결론지어진다.


이 일로 서울대는 남의 공을 가로챈 부도덕함에 대한 여론의 비난을 받는다. 그뿐. 아니라 '약탈 문화재를 반환'하는 도쿄대를 '선의의 기증자'로 바꾸어 버렸다. 7월 12일 실록 기증 기념식에 환수위 관계자는 부르지도 않았다. 서울대와 도쿄대 관계자만 모여 조촐한(?) 기념식을 한다.


7월 25일 실록환수특별전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실록이 공개된다. 이날 공개된 실록을 보고 참석자들은 깜짝 놀란다. 서울대가 국보인 반환받은 실록의 표지 뒤에 '서울대 규장각 소장'이라는 도장까지 찍어 놓았다. 또다시 여론의 비난을 받는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문화재청은 실록의 소장처를 고궁박물관으로 결정한다. 하지만 서울대는 그 후에도 몇 년간 실록을 이관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실록을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실록 반환운동을 통해 본 기득권층의 역사 인식


문화재청은 실록이 민간운동으로 반환받은 것이 아니라 도쿄대가 기증하여 돌아온 것이라는 입장이다. 실록의 일본 반출은 약탈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통치행위에 의한 국내 이관이라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그렇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관료나 지식인, 언론들은 자신들의 동포들이 일본까지 가서 싸워서 돌려받은 노고는 싹 무시하고, "도쿄대의 양심적 결단에 감사한다. 일본의 양심이 살아 있는 것을 느꼈다"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동포들을 폄훼하고 도쿄대를 높이는 태도를 보인다고 혜문 스님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전형적인 식민지 근성이라고 덧붙인다.

조선왕조도서 환수 유공자 훈장 전수식 모습, 사진 출처 : 월정사 왕조실록·의궤 박물관

2011년 조선왕조의궤까지 반환받은 후, 2012년 정부는 정념 스님과 혜문 스님 등 조선왕조 도서 환수 유공자에게 훈장을 수여한다. (2022. 9. 1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