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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리가 전하는 관계의 회복에 대한 냉혹한 통찰

영화 <내 말 좀 들어줘(Hard Truths)> 리뷰

by 제이바다

▷한줄평 : 관계의 회복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네 인생을 반추하는 잔혹한 통찰

▷평점 : ★★★★

▷영화 : 내 말 좀 들어줘(Hard Truths), 2025.8월


가족이란 때로는 가장 따뜻한 울타리이면서, 동시에 가장 차가운 벽이 되기도 하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처는 깊고, 회복은 더 어렵다.
독설 속에 감춰진 사랑의 결핍이 만들어낸 불안과 외로움대한 이야기,
영화 <내 말 좀 들어줘>는 끝내 현실 속 '불편한 진실'로 나를 반추한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팬지는 식탁에서조차 불평, 불만섞인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불만으로 가득 찬 한 여인, 팬지

세상 모든 것이 못마땅한 중년 여인, 팬지(마리안 장 밥티스트).

그냥 다 끝났으면 좋겠어.”라는 고백에서 그녀의 삶이 얼마나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팬지의 언어는 칼날 같다. 가족, 친구, 이웃들과 낯선 사람들까지 누구도 예외가 없다.

집 안에서는 아들과 남편을 향한 끝없는 잔소리와 힐난이 쏟아지고,

집 밖에서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도 서슴없이 인격모독성 독설을 가한다.

영화는 초반 내내 그녀의 거칠고 불편한 배설들을 담아내며 관객을 서서히 옭아맨다.


처음에는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을까?' 싶다가도,

어느 순간 내 주위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고,

숨기고 싶은 나의 정서적 결핍이 거울에 비춰지는 듯하다.

나이가 들수록 사소한 일에도 고집스러워지고,

잦아진 불평과 불만 속에서 외로움이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불쑥 얼굴을 내민다.

그 순간, 스크린 속 그녀의 이야기가 어느새 나의 이야기가 된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샨텔은 두 딸과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눈다


배려 깊은 대화의 고수, 샨텔

팬지와는 정반대로, 동생 샨텔(메셀 오스틴)은 경청과 배려가 몸에 배어 있다.

헤어 디자이너로 일하는 샨텔은 손님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를 나누고,

집에서는 두 딸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일상을 나눈다.


지나치게 잘 정돈되고 깔끔해서 오히려 경직되어 보이는 팬지의 집과 달리
샨텔의 집은 비좁고, 어수선하지만 정서적인 안정감이 느껴진다.


언니의 불평불만 가득한 독설에도 등을 돌리지 않는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5주기 기일, 두 자매는 함께 묘지를 찾는다.
샨텔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따스한 품이었지만,
팬지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늘 무관심했고,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자신에게 어린 동생을 맡기던 사람이었다.
묘비 앞에서 팬지는 끝내 눈물을 쏟는다.


그녀의 지금의 불평, 불만은 지나온 긴 시간동안 퇴적된 정서적 상처들의 표출이었다.

흐르는 눈물은 그녀가 짊어져온 무거운 과거를 드러낸다.

그래서 샨텔은 말할 수 있었다.
언니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사랑해.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온 가족이 모인 모임에서조차 팬지는 불청객인 듯 외롭다


웃음은 눈물로, 희망은 현실로 – 끝내 좁혀지지 않는 거리

오래간만에 온 가족이 모인 '어머니의 날',
다들 웃고 떠들지만 팬지는 불청객처럼 이 자리가 불편하기만 하다.


그때 아들 모지스가 몰래 꽃 선물을 배달해 두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지더니, 이내 폭풍 같은 울음으로 바뀐다.

집에 돌아와 어두컴컴한 부엌 식탁에 앉아 환하게 밝은 안뜰을 향해 오랫동안 응시하다가

불현듯 아들이 사다 놓은 꽃을 꽃병에 담아 식탁에 올려 놓는 장면은
긴 고립의 시간을 깨고 희망으로 향하고자 하는 팬지의 의지를 암시한다.


하지만 변화는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잠을 청하기 위해 침실로 들어간 사이 남편은 식탁위 꽃을 냅다 내다 버린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무너져 버린 서로간의 간극은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다.

팬지는 이불을 감싸고 웅크린 채 침묵을 응시하고, 남편은 식탁에 홀로 앉아 조용히 눈물을 삼킨다.


어쩌면 무너진 관계의 회복은,
이제는 가끔씩 필요할 때만 만나는 동생 샨텔이 아닌,
매일 숨쉬는 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남편 커틀리와 아들 모지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샨텔이 과거의 가족이라면, 현재의 가족은 남편과 아들이다.
과연 이들은 미래도 함께할 수 있을까?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뭔가 실마리가 될 듯싶었던 꽃은 끝내 버려지고 말았다


마이크 리가 전하고 싶은, 냉혹한 현실에 대한 통찰

<내 말 좀 들어줘>는 화해와 치유의 드라마틱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는 어렵고, 깊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 결말이 반전이라면 반전이고, 현실이라면 현실이다.


그래서 영화의 원제는 Hard Truths.
'불편한 진실' 또는 '냉혹한 현실'이다.
우리네 삶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이야기이다.

81세 나이의 거장 '마이크 리' 감독은 자신의 인생의 참혹한 통찰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포스터

202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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