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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날 수는 없어도 견뎌내야 할 '혐오스런' 인간의굴레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리뷰

by 제이바다

▷한줄평 :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의 비극, 그것은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굴레

▷평점 : ★★★★★

▷영화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嫌われ松子の一生, Memories Of Matsuko), 2006년


삶은 고해(苦海)다.


저명한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콧 펙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가 인생의 고통을 직면하고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성숙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수많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불행의 반대말은 ‘일상’이다”라고 말했다. 별일 없이 흘러가는 평온한 하루,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헤르만 헤세 역시 『데미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진짜 나로 살아가는 일조차 수많은 난관과 힘겨운 고통이 따른다.


그렇기에 마츠코의 삶을 특별한 어떤 한 사람의 비극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그녀의 ‘혐오스런 인생’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숙명과도 같다.


표정은 습관이 되고,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되었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의 삶을 ‘시선투쟁’의 과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규범에 맞서야 비로소 주체적 개인으로 설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늘 냉혹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 폭력적 ‘시선’ 앞에 굴복하며 치욕적인 선택을 하곤 했던가.


마츠코 역시 그 싸움에서 패배했다. 결국 그녀의 ‘시선투쟁’의 실패는 평생을 옭아매는 덫이 되었고, 결국 비극적 종말로 이어졌다

.

마츠코의 불행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무관심에서 시작된다. 아픈 동생에게만 쏠린 시선을 끌어내기 위해, 그녀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습관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 성격이 되었으며, 결국은 인생의 태도가 되어버렸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컷 / 마츠코는 아빠의 시선이 늘 그립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컷 / 마츠코의 익살스러운 표정은 왜곡된 자아를 드러낸다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부조리, 불행은 왜 연속해서 오는가?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점차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의존하는 성격으로 굳어졌다. 어릴 적 사랑받지 못한 결핍은 성인이 되어서도 왜곡된 자아로 드러났다. 마츠코는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했지만, 돌아온 건 폭력과 배신 뿐이었다.


제자의 배신, 교감의 성추행, 폭력적 연인의 자살, 불륜의 결말, 윤락을 강요하던 남자의 죽음, 감옥에서 놓친 사랑, 그리고 끝내 외면한 제자…. 그녀의 관계는 언제나 파국으로 끝나 버렸다.


급기야 유독 자신에게만 이런 파국의 상황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 마츠코는 오열과 함께 부르짖는다.


왜?, 왜?, 왜?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컷 / 몇 번이고 모든 걸 바쳐 사랑한 남자들에게 버림받은 뒤 했던 말


그 물음은 곧 우리의 물음이기도 하다.


죽어야 끝나는 이 지긋지긋한 인간의 굴레

결국 그녀는 은둔 생활을 하며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옛 친구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보려 애쓰지만, 53세라는 젊은 나이에 우발적 폭행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불행은 마지막까지도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의 책임이 자신에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자학한다. 마츠코는 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남겼다.


“태어나서 미안합니다”


이 한 문장은, 그녀의 삶을 압축하는 동시에 우리 모두의 비극을 대변하는 듯하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컷 / “태어나서 미안합니다” 낙서

영화는 그렇게 한 여인의 폭력적 상황을 애써 외면하며 비극적으로 끝을 맺는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 모두 그렇지 않은가?’라고 절규라도 하는듯하다. “왜?”라는 질문마저 무색해지는 우리 인생의 근원적 비극적 좌절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죽어야만 끊어낼 수 있는 인간의 굴레일 뿐이다.

“어릴 땐 누구나 자기 미래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어른이 되면 자기 생각대로 되는 일 따윈 하나도 없이 늘 괴롭고, 한심하기만 하죠”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중


벗어날 수는 없어도, 견뎌내야 할 ‘혐오스러움’

죽음 이후 마츠코는 하늘을 향한 계단 끝에서 환한 미소를 띤 아버지와 동생을 마주한다. 하지만 그 장면은 더없이 애절하다. 비로소 아버지는 마츠코가 얼굴을 찡그리지 않아도 활짝 웃어보인다. 그 장면에서 가슴이 미어지고 슬픈 눈물이 흐른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컷 / 더 이상 애써 찡그리지 않아도 되는 마츠코

영화는 인생을 억지로 가치 있다고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굴레를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마츠코가 겪은 ‘혐오스러움’은 사실 우리 모두가 견뎌야 할 인간의 고통 그 자체이다. 끝내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서글프지만 어쩔 도리 없다. ‘혐오스러움’은 극복되지 않지만, 이겨내야 할 인생의 숙제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부조리 앞에 무기력하게 나를 내어주고 지배당하고 살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지를 자신의 삶의 중심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것만큼 불행한 인생은 없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시선투쟁’에 굴복하지 않고 타인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끝없는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내딛다보면 언젠가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위로를 만나게 될 것이다.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속 소냐의 독백이 작은 희망이 된다.

“바냐 아저씨, 어쩌겠어요. 살아야죠. 길기도 긴 낮과 밤을 끝까지 견뎌내야죠.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시련을 꾹 참고 버티는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때가 오면, 그땐 죽음을 공손히 받아들이고 무덤 저편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우리가 얼마나 울었는지 또 얼마나 슬펐는지 다 말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겠죠. 그날이 오면 우리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거예요.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겪었던 우리의 슬픔을 돌아보며 따스한 미소를 짓게 되겠죠. 그리고 마침내 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믿어요.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그곳에서 우린 쉴 수 있어요.”
안톤 체호프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의 독백 (일부 의역)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바로, 우리 모두가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고통과 존엄에 대한 이야기다.


202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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