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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투, 다시 시작하는 우리 안의 혁명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리뷰

by 제이바다

▷한줄평 :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의 어나더(Another)가 있을 뿐

▷평점 : ★★★★

▷영화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 2025.10월


이데올로기 혁명은 사라지고,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극단주의의 득세는 이제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일명 ‘PTA’)은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를 통해 제목 그대로 ‘끝나지 않는 싸움’을 이야기한다. 그는 어떤 전투가 남아 있다고 말하려고 하는 걸까?


영화는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가 이끄는 무장혁명단체 ‘프렌치 75’가 캘리포니아 이민자 수용소에 억류된 불법 이민자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수용소를 급습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성적으로 모욕을 당한 수용소 지휘관 스티븐 J. 록조 총경(숀 펜)은 이들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다짐한다. 이후 퍼피디아의 배신으로 혁명 조직은 와해되고,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딸 윌라 퍼거슨(체이스 인피니티)은 신분을 위장한 채 16년간 숨어 지낸다. 록조는 극우 백인우월주의 비밀결사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CAC)’ 가입을 앞두고 이 부녀를 제거하기 위해 은신처를 급습하고, 윌라를 납치하는 데 성공한다.


쫓고 쫓기는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전투의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타락한 혁명가,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

‘프렌치 75’의 리더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는, 이름부터가 ‘배신’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Perfidia와 LA 부촌의 상징 ‘베벌리 힐스’를 합친 조어다. 그 이름처럼 그녀는 혁명가의 모순과 이중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민자 수용소에 구금된 불법 이민자들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공권력에 타격을 입히며 혁명의 성공을 꿈꾸지만, 그녀의 끊임없는 성적 일탈과 쾌락의 탐닉은 혁명의 순수성을 퇴색시키고 희화화한다. 의기양양해진 그녀는 은행강도 중에도 단순한 경비원의 목숨을 빼앗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생명을 존중하는 혁명가의 윤리는 찾아볼 수 없다. 혁명가가 꼭 도덕적인 존재일 필요는 없지만, 그녀의 혁명은 이미 욕망에 잠식당한 지 오래되었다.


이윽고 록조에게 체포된 뒤, 풀려나는 대가로 자신의 육체를 제공하고 동지들의 주거지를 팔아넘기는 순간, 그녀는 혁명의 신념을 완전히 배신한다. 부끄러움도, 죄의식도 없다. 퍼피디아는 성을 매개로 한 원초적 욕망에 무너지고, 끝내 처절한 패배자로 남는다. 결국 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린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컷 – 퍼피디아와 밥은 딸 윌리를 낳는다. 윌리는 록조의 집요한 추격의 원인이 된다.


타락한 권력자, 스티븐 J. 록조

실패한 혁명의 빈자리를 극단주의적 권력자의 탐욕이 자리한다. 록조는 사회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폭력과 억압을 일삼으면서도, 사적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이민자 수용소 습격 당시 퍼피디아에게 당한 성적 모욕을 복수하기 위해 그녀를 끈질기게 쫓는다. 흑인 여성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탐닉하면서도, 우생학적 신념 아래 이민자·흑인·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앞장서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16년이 지난 뒤, 그는 극단적 백인우월주의 단체 CAC(Christmas Adventurers Club, ‘A’는 남근을 상징)에 입단을 앞두고 ‘타 인종 여성과 관계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혹시 퍼피디아의 딸이 자신의 친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를 광기로 몰아넣는다. 밥과 윌라를 제거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를 추동한다.


권력자의 타락은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으로 표출된다. ‘신분상승’의 기회를 무산시킬 수 있는 거짓이 탄로 날까 두려운 나머지 그는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기 시작한다. 불법 이민자와 마약 단속을 명분으로 MKU 특수경찰 조직을 대대적으로 동원한다. 기시감이 드는 이 장면은 전혀 낯설지 않다. 이런 타락한 권력자의 권력의 사유화는 파국의 시발점이 된다.


그러나, 결국 록조는 자신이 몸담고자 했던 CAC 내부로부터 제거 대상이 된다. 이미 흑인과의 관계로 ‘더럽혀진’ 존재라는게 들통났기 때문이다. 타락한 권력자들 사이에 ‘이해와 용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록조의 최후는 권력의 허상이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는지 명징하게 보여준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믿는 순간, 그 권력의 허구는 가장 우연한 방식으로 붕괴된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컷 – (좌)프렌치 75에 체포되는 록조, (우)추격에 나서는 모습


밥과 윌라, 두려움을 넘어선 자유의 여정

그렇게 혁명가와 권력자 모두 내면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자멸했다. 그렇다고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가 쉽게 자유를 거머쥔 것도 아니다. 한때 ‘게토 팻’이라 불리던 폭발 전문가였던 밥은 이제 술과 마약에 찌들어 딸과의 약속 암구호인 “What time is it?”조차 기억해 내지 못한다.


그들이 록조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는 과정에서 만난 ‘박탄 크로스’(불법 체류자들의 은신 및 탈출을 돕는 조직)와 ‘용감한 비버 자매회’(겉으로는 수녀원을 표방하지만 혁명가들을 지원하는 단체)는 이들에게 자유를 되찾을 기회를 제공한다. 이들은 혁명가도, 권력자도 아닌, 그 둘의 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쉘터’이자 피난처다. 그들은 한순간의 집약된 에너지를 분출하는 폭발적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조용히 고통받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보호한다.


박탄 크로스의 리더 세르히오(베니시오 델 토로)는 밥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유가 뭔지 알아? 두려움이 없는 거야.” / 세르히오 생카를로스 (베니시오 델 토로)


세르히오의 이 말은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관통한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혁명이 아닌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에 있다는 것.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컷 – (좌)딸을 구하기 위해 추격하는 밥, (우)록조의 납치 중에 탈출을 모색하는 윌라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컷 – 박탄 크로스의 리더 세르히오는 조용히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돕는다

끝나지 않은 전투, 다시 시작되는 혁명

추격전의 종착지인 추파카브라 힐에서 펼쳐지는 카 체이싱 장면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롤러코스터와도 같은 ‘전투의 반복’을 상징한다. 결국 새로운 희망인 윌라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따르던 차량을 제거하는 순간, 부모세대에서 자녀세대로 이어지는 새로운 전투가 시작된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컷 – 차량 추격전이 벌어졌던 추파카브라 힐. 롤러코스터같기도 하고, 넘실대는 파도처럼 보이는 끝나지 않는 혁명의 길을 암시하는 명장면이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컷 – 임신한 상태로 총을 난사하는 엄마 퍼피디아와 수녀원에서 사격 연습을 하는 딸 윌리의 모습은 세대를 잇는 끝나지 않는 전투를 의미한다.


이제 혁명은 더 이상 한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 아니다.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연대(連帶)하며 싸워 나가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전투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는 공동체를 향한 염원이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음을 말한다. 설령 몇몇 전투에서 패배하더라도, 그 이후의 전투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열망이 존재하는 한, 전투는 계속된다. 패배 또한 반복되지만, 그 반복 속에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라는 가치를 쟁취하기 위한 인간 존중의 투쟁은 인류가 사라지기 전까지 벌여야 하는 끝이 없는 전쟁과도 같다. 그래서 ‘또 하나의 전투’는 우리 안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진짜 혁명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포스터

202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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