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보> 리뷰
▷한줄평 : 죽음마저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한 예술가의 애절하고도 간절한 고뇌
▷평점 : ★★★★
▷영화 : 국보(国宝, Kokuho), 2025.11.19개봉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일본의 전통 연극인 가부키(歌舞伎)극 ‘백로 아가씨’를 열연하던 주인공 키쿠오(요시자와 료)는 나지막이 읊조린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극도의 경지에 이른 ‘인간 국보(人間 国宝)’ 키쿠오는 그 순간 무엇을 본 것일까. ‘백로 아가씨’는 인간과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고통받는 백로의 정령이 처녀의 모습으로 변했다가, 다시 백로의 본모습으로 돌아가며 죽음으로 사라지는 이야기다. 흩날리는 벚꽃 아래에서 춤추는 그 비극적 아름다움 속에서, 키쿠오는 죽음조차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인 듯 보인다.
17세기 에도 시대에 시작된 가부키는 노래와 춤, 연기가 결합된 당대 최고의 대중오락이었다. 여성의 출연이 금지되면서 여성 배역은 오롯이 남성 배우가 맡았고, 이들을 ‘온나가타(女形)’라고 불렸다. 영화 <국보>는 바로 이 ‘여성을 연기하는 남성 배우’의 삶을 깊이 파고든다. 특히 가부키는 철저한 세습 체계 속에서 운영되기 때문에, 가문의 피를 이어받지 못하면 최고의 배우가 되기 어렵다. 이 출신 장벽은 영화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핏줄을 타고난 슌스케, 재능을 타고난 키쿠오
야쿠자 두목이던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고 가부키 명문가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의 집에 맡겨진 키쿠오, 그리고 그 집의 적통 아들로 태어나 가업을 이어가야 하는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 이 두 예술가의 비극적 엇갈림은 결국 ‘혈통’에서 출발한다. 키쿠오는 야쿠자의 피를, 슌스케는 가부키 명문가의 피를 타고난 것이다.
숙명을 거슬러야 하는 자와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의 삶의 무게를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남성으로서 여성의 섬세한 몸짓, 표정, 목소리를 흉내 내는 수준을 떠나, 온 몸이 그 감성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훈련은 눈물겹도록 고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성장기에는 서로가 경쟁을 하면서도 그 혹독한 훈련이 남긴 고통의 신음속에서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 볼 여유까지는 없었다.
그렇게 서로를 시기하면서도 온전한 '온나가타'로 성장해 가는 과정은 지난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지로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공연에 설 수 없게 되자, 그는 자신의 대역으로 키쿠오를 지명한다.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키쿠오의 천부적 재능은, 적통 아들의 신분조차 넘어서고 만다. 그러나 분장대 앞에서 손을 떨며 불안해하는 키쿠오는 자신에게 명문가의 피가 없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해한다.
“나에겐 나를 지켜줄 피가 없잖아. 네 피를 담아 벌컥벌컥 마시고 싶어.”
슌스케는 경쟁자이면서도 이런 키쿠오의 분장을 직접 도와준다. 서로를 질투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떠나서는 완성될 수 없는 관계. 예술가란 결국 자신을 견디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타인의 그림자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굴곡진 삶의 과정을 지나서야 발견한 예술적 지향점
키쿠오와 슌스케는 서로의 재능과 혈통을 질투하며 점점 깊은 고뇌 속으로 빠져든다. 가부키 ‘소네자키 동반자살’을 객석에서 보던 슌스케는 키쿠오의 연기에 압도돼 집을 떠날 결심을 한다. 그리고 8년 후, 아들을 기다리다 지친 한지로는 자신의 아들을 대신해 키쿠오를 2대 계승자로 지명한다.
그러나 삶의 명암은 언제나 예고 없이 뒤바뀐다. 키쿠오가 야쿠자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과 사생아를 숨겼다는 이유로 무대에서 퇴출되고, 반대로 이름모를 지방을 떠돌던 슌스케는 다시 가부키계에 복귀한다.
이런 거친 굴곡의 시간 끝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깨닫는다. 예술에서 이겨야 하는 대상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예술가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야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끝내 당뇨로 다리 절단할 수밖에 없던 슌스케는 과거 키쿠오에게 빼앗겼던 ‘소네자키 동반자살’을 다시 무대에 올리며,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였는지 돌아본다. 어쩌면 키쿠오의 예술적 감수성과 섬세함 또한 슌스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키쿠오의 세계를 함께 ‘보지 못했던’ 세 여인들
키쿠오의 인생에는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함께 문신까지 새기고 뒷바라지를 나섰던 하루에(타카하타 미츠키), 무명 배우였던 시절 그의 가능성을 믿었던 게이샤 후지코와(미카미 아이), 그리고 키쿠오가 야망을 품고 접근한 아키코(모리 나나). 세 여성은 모두 그를 사랑했지만, 키쿠오는 늘 그들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아키코의 이 질문에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키쿠오는 무대 위에서 빛나는 예술적 영광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상처와 희생이 있었는지 끝내 돌아보지 못한다. 그의 시선은 오직 더 높은 곳, 더 아름다운 절정만을 향해 있었다.
죽음조차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예술가의 삶
다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 ‘백로 아가씨’를 연기하는 키쿠오의 섬세한 표정과 숨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벚꽃 아래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가는 백로의 정령의 모습은 그의 어린 시절, 눈 내리던 정원 한가운데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 키쿠오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일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자, 예술적 원천이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며 흩날리는 꽃잎처럼, 죽음은 그에게 두려움이 아닌 아름다움의 절정으로 다가왔다.
영화는 가부키극 <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 <도조지의 두 사람>, <소네자키 동반자살>, <백로 아가씨>를 통해 현실의 비극과 무대 위 죽음의 미학을 교차시킨다. 특히 마지막 가부키극 <백로 아가씨>의 무대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카메라는 통해, 가부키는 무대를 통해 죽음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영혼을 갈구하는 예술가적 고뇌를 화면 가득 담아낸다. 작가는, 주인공은 결국 죽음조차 아름다움으로 승화해낸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이 한마디는 키쿠오의 삶과 예술, 고통과 사랑, 모든 것을 관통하는 마지막 고백이다.
영화 <국보>는 가부키라는 일본 전통 무대 위에 한 예술가의 숭고한 고뇌를 화려하게 수놓는다. 혈통조차, 사랑조차, 죽음조차도 뛰어넘어 얻어낸 그의 절정 - ‘영혼의 아름다움’은 애처롭고도 찬란하다. 이런 탐미주의적 예술가가 성취한 아름다움은 그의 인생의 긴 시간 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고통과 슬픔의 결정체이다. 그 아름다움은 일본 전통 예술이 주는 편견을 뛰어넘어 보편적 예술적 가치를 공감으로 이끌어 내는데 결코 부족함이 없다. 지금도 그의 눈 속에 깃든 예술혼은 깊은 울림과 전율로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참고자료]
(주1) 영화 <국보>속 가부키극 https://kokuhou-movie.com/keywords.html
1. 関の扉(세키노토 / 국경의 관문)
눈 덮인 산에 기이하게도 벚꽃이 활짝 핀 가운데, 충신 무네사다와 그 연인 고마치히메가 재회한다. 그러나 관문지기 세키베의 정체가 왕위를 노리는 악당 구로누시임이 드러나고, 벚나무를 베려는 그와 벚나무의 정령 스미조메가 격투를 벌인다.
2. 連獅子(렌지시 / 연사자)
사자(獅子)의 전설을 바탕으로 아버지 사자가 새끼를 시련 속에서 강하게 키우는 모습을 춤으로 표현한다. 아비와 새끼 사자가 정령으로 나타나 모란꽃과 함께 역동적으로 춤추며 부모·자식의 유대를 보여준다.
3. 二人藤娘(니닌후지무스메 / 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
등나무 꽃의 정령 두 명이 나타나 여인의 애달픈 연정과 남자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한다. 사랑의 설렘·질투·속상함을 섬세한 춤으로 보여주는 서정적인 작품이다.
4. 二人道成寺(니닌도조지 / 도조지의 두 사람)
과거 남자를 구렁이로 변한 여자가 종째로 태워 죽였다는 전설이 깃든 도조지. 종이 다시 세워지자 시라뵤시 무희(사실은 원혼)가 나타나 다양한 춤을 추다가 결국 뱀의 본성을 드러내며 복수심을 드러낸다.
5. 曽根崎心中(소네자키 신주 / 소네자키 동반자살)
사랑하는 도쿠베와 오하쓰가 모함과 사회적 규탄으로 인해 더 이상 살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마지막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뒤 소네자키 숲에서 비극적인 동반자살을 선택한다.
6. 鷺娘(사기무스메 / 백로 아가씨)
백로의 정령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인간을 향한 이루지 못할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결국 정령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사랑의 좌절 속에서 눈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서정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작품이다.
(주2) 가부키극 <백로 아가씨> 공연 모습 https://www.youtube.com/watch?v=wOA55Sm7Lbg
2025.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