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수토 Aug 11. 2022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책 제목이 아니라 우리 막내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로 오면서 구한 집은 방이 네개였다. 가장 작은 방을 큰딸에게 배정하고 가장 큰 방은 남자애들 둘이 같이 쓰라고 줬다. 나머지 하나는 각각 안방과 서재로 썼다. 서재는 큰 창문으로 제법 나무가 많이 보이고 저 멀리 석양이 보이는 조용한 방이었다. 나무 책꽃이와 내 책상을 놓으니 잘 어울렸다. 


일년 사이에 둘째랑 막내가 한 침대에서 자는 게 힘들어졌다. 잠드는 스타일이 매우 다른 두 명은 밤마다 티격태격했다. 둘째는 일말의 불빛도 허용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전구가 꺼지듯 탁 잠드는데, 막내는 저 멀리 안방에 켜진 스탠드 불빛까지 더듬어 의지하면서 어둠을 이겨내려 애쓰다가 천천히 잠든다. 막내는 햄스터 모양의 수면등을 가지고 있는데 권력자인 둘째가 못 켜게 했다. 막내는 밤마다 햄스터를 침대 밑 구석으로 밀어넣은 채로 켜뒀다. 둘째는 동생 구박한다고 매일 밤 혼났는데, 저도 동생때매 불편하다고 늘 억울해했다. 


얼마전 신랑이 출장 간 김에 막내를 데리고 잤는데, 내가 자꾸 밀려났다. 몸부림이 심한건 똑같은데 몸집이 예전보다 커져서 존재감이 상당했다. 아침에 막내 발 밑에서 모로 누워 자고 있으려니 막내가 천진하게 엄마 왜 그러고 있어? 하고 물었다. 둘째도 고생했겠구만. 내 마음 속 막내는 아직도 조막만한데 사진찍어 놓으면 키도 덩치도 너무 커서 깜짝 놀란다. 이제 더이상 아기가 아니다.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방을 갈랐다. 둘째에게 서재를 내줬다. 서열대로 가장 큰 방은 큰 딸에게 주고 큰 딸이 쓰던 작은 방을 막내에게 줬다. 막내는 작은 방이 안방과 가깝다고 좋아했다. 셋 다 방을 바꾸었으므로, 본의 아니게 작은 이사를 했다. 나는 옷과 책을 옮기고 막내는 장난감을 야무지게 분류해서 정리했다. 서랍에 넣을 건 넣고 진열할 건 따로 골라서 책장에 펼쳐놨다. 그렇게 자기만의 물건을 늘어놓더니 너무 아늑하고 좋다고 했다. 벽에 본인이 그린 게임 캐릭터 그림도 붙이고 방 문에 welcome to my room 이란 글자도 써서 붙여놨다. 나의 방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방을 늘리니 세간이 더 필요해서 이케아에 갔다. 첫째는 연필꽂이와 액자틀을 샀고, 아 정말이지 프랑스적인 우리 막내는 작은 나무 화분을 골랐다. 화분은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놓아두었다. 막내 방은 오후 늦게 해가 들어오는데, 이케아에서 온 작은 나무도 늦은 오후 햇빛을 받으니 행복해보였다. 이제 누가 봐도 이곳은 막내만의 방이었다.


모두가 행복했다. 첫째는 방이 커져서 좋고 둘째는 혼자 잘 수 있어서 좋고 셋째는 자기 방이 생겨서 좋다. 아기때는 방이 있어도 다들 마루로 나와서 복작거리곤 했는데, 이제 막내마저 자기 공간을 차지하고 들어가는 걸 보니 새삼스럽다. 대신 서재에 있던 내 책상은 마루로 나왔다. 내놓고 보니 그 자리도 나쁘지 않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고정적인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난 소설은 못 쓰겠지. 어차피 쓰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이제와서 뭐가 새로 되기도 어려울텐데 왜 그런 생각을 하면 약간 슬픈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모두 행복해하는 걸 보니 나도 행복한 거 같기도 하다.  


막내의 나무 


작가의 이전글 자신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