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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i Oct 25. 2020

작은기쁨 무말랭이

따뜻한 밥 한 끼





퍼석퍼석 잘 말려진 무말랭이는 새하얗지 않다. 누르스름하고 그런 누르스름한 냄새가 난다.


누르스름함에 오도독 단맛이 햇빛과 바람에 농축되어있다. 바락바락 주물러 씻어 주어야 한데서 물 조금 부어 열댓 번 거칠게 먼지를 털고 흐르는 물에 헹구어 대충 짠다. 절임장에 재워서 먹을 거라 물기가 남아도 괜찮다.







지난번 간장, 원당, 식초, 물을 끓여 담군 버섯 장아찌의 버섯은 건져 먹고 남은 국물은 무엇을 해도 맛있을 만큼 감칠맛이 깊어졌다. 다시 한번 폴폴 끓여서 뜨거울 때 부어준다. 고추가 있어 대여섯 개를 함께 넣었다.





어려서 할머니가 무를 바늘로 꼬아 주려고 실타래를 먼저 붙잡고 나의 조그마한 두 손을 빌리던 게 기억난다. 바느질하는데 꼬이지 않도록 두꺼운 종이를 눌러 실을 말아주는데 그 옆에서 실이 엉키지 않게 실을 두 손 사이에 느려 뜨려 붙잡고 있었다.





이렇게 내가 손을 벌리고 실을 붙잡고 있으면 할머니는 그걸 단단히 접은 종이에 말아 썼다. 물론 바늘구멍에 실을 꿰어 넣었던 것도 나였다. 바늘로 무를 하나하나 꼬아 처마 밑에 매달고 대롱대롱 가을 햇빛과 바람으로 말렸다.


그럼 수분을 머금고 매달려 있는 새하얀 무가 춤을 추며 반짝반짝 빛난다. 그 옆으로 영롱한 빛을 내는 홍시가 빙글빙글 돌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선명히 가슴에 남아있다. 그 시절 나는 작은 기쁨들에 대하여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도시의 소음들 속에서… 설명이 가능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무력해지는 기분을 동반한다. 그럼 굳이 가능하지 않은 것에 희망을 걸기보다 지금 이곳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에 에너지를 쏟는 게 좋을 것 같다.


때론 아득하다가도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일상의 기쁨은 많은 곳에 흩어져 있다. 이 기쁨은 밖의 조건이 아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인식이 만들어가고 있다.




헤르만 헤세의 아주 오래전 출판 된 낡은 책을 도서관에서 기쁜 마음으로 발견했다. 책 냄새를 맡고 누런빛 페이지를 매만진다… 거기에 작은 기쁨에 대하여 이렇게 적혀있다.


“이를테면 신선한 꽃이나 과일의 냄새를 맡는 기쁨,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기쁨,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신비하고 순수한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의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흥얼거리는 것도 이 기쁨에 속하며, 일련의 밝고 사소한 일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우리에게는 커다란 기쁨이 아니라 작은 기쁨들에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가슴이 진정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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