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밥 한 끼
가을에는 맑고 높은 하늘과 뭉게구름, 따뜻한 햇살이 있다. 도시락을 챙겨 소풍 가기 좋은 날씨.
강원도 원주에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님이 소설을 쓰며 말년을 보낸 옛집이 문학공원으로 재조성 되어있다. 공원 부지가 대단한 것도 아니고 코로나로 인해 박물관도 잠정적으로 폐쇄된 상태라 관광객의 눈길을 끌 만한 것을 생각해보기 어렵다. 역시나 반나절 앉아 있어 보아도 동네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 지나가는 게 전부이다.
나는 이곳에 도시락을 싸서 왔다. 조용히 가을날의 건조한 공기와 따뜻한 햇볕을 느끼며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내리쬐는 볕에 홀로 선 나무의 잎은 빛을 찾고 바람에 다 같이 노래를 부른다. 고독하지만 기쁨이 있는 풍경. 나 역시 계절을 가만히 느껴본다.
공원 중심부에 박경리 선생님이 살던 집과 텃밭이 그대로 관리되어 있고 마당이 넓게 펼쳐져 있다. 주변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다. 집 옆으로 파라솔이 있는 야외 테이블과 간이 의자가 있다. 여기에 앉아 있으면 이 집의 주인이 된 것만 같다. 이 집 주인은 이곳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작가는 1980년부터 1998년까지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남은 외동딸 남편의 옥고와 관련하여 시댁인 원주로 오게 되며 함께 원주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20대 초 결혼을 하며 고향인 통영을 떠났다가 30대에 다시 고향에 돌아가 아들의 선생님과 재혼을 하지만 결국 혼자가 되어 고향을 다시 떠났다. 이후로 50년간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독신으로 지내며 이곳에서 역시 많은 시간 혼자 보냈다. 공원에 이런 시가 적혀 있었다.
옛날의 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횡덩그레한 큰 집에 /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 이른 봄 /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 나를 지탱해 주었고 / 사만천을 생각하면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 나를 지켜주는 것은 /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 그랬지 그랬었지 / 대문 밖에는 /늘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 까치 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