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도입했는데, 왜 결정은 바뀌지 않을까 (11)

— 삼성 ‘신경영’을 AI 시대에 다시 묻다

by Jace

많은 기업이 AI를 도입했다.

데이터도 충분히 쌓였다.

대시보드와 리포트는 넘쳐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회의는 줄지 않고,

의사결정은 여전히 느리다.


이 이야기는

AI를 도입했지만

아직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가

정리되지 않은 조직에서

흔히 나타나는 장면과 닮아 있다.


AI를 쓰고 있지만

결정의 기준은 여전히

‘작년에도 그랬다’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AI·데이터 시대의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문제는

판단 기준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데이터는

결정을 바꾸기 위해 존재하는데,

많은 조직에서

결과를 설명하는 용도로만 쓰인다.


그래서 데이터와 숫자는 늘어나지만

선택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1995년,

삼성의 불량 제품 화형식.


이 장면은 종종

강압적 리더십의 상징으로 소비된다.


하지만 당시 신경영(新經營)의 본질은

불을 붙인 행위 자체가 아니었다.


핵심은

무엇을 기준으로 버렸는가였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문제 삼은 것은

불량품 자체가 아니라,

불량을 허용하는 사고방식이었다.


“이 정도면 된다.”

“고객은 결국 모른다.”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고치자.”


신경영은

내부의 이런 타협 논리와의 결별 선언이었다.


중요한 점이 있다.


신경영은

모든 것을 부정하자는 구호가 아니었다.

현장을 무시하자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부에서 옳다고 믿어온 판단을

외부 기준으로 다시 검증하라는 요구였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핵심은

막무가내로 “다 바꿔라”가 아니라,


조직이 당연하다고 믿어온

일의 방식, 판단의 논리, 성공의 정의를

바꾸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옳다고 믿어온 기준부터 의심하고,

바꿀 수 없는 것과

반드시 바꿔야 할 것을

명확히 구분하라는 선언이었다.


무차별적 파괴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성공 방식을 의심하는

선별적 자기부정이 핵심이었다.


이 문장은

AI·데이터 시대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오늘날의 ‘불량’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재구매율이 낮아도 유지되는 주력 상품

• 할인 없이는 매출이 유지되지 않는 브랜드

• KPI는 좋아 보이지만 현금이 남지 않는 사업

• 데이터로는 보이지만, 회의에서는 말해지지 않는 문제들


겉으로는 성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래를 잠식하는 신호들이다.


그래서 AI·데이터 시대의 신경영은

기술 도입이 아니다.


의사결정의 권한과 기준을

데이터 쪽으로 이동시키는 일이다.


질문은 단순하다.


“이 선택은

우리의 경험과 관성 때문인가,

아니면 데이터가 정말로

옳다고 말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회피하는 순간,

AI는 장식이 되고

데이터는 보고서에만 머물고 만다.


현대판 화형식은

불을 쓸 필요가 없다.

• 매출 상위라도 재구매율이 낮으면 멈춘다

• 손익이 아니라 LTV(Lifetime Value, 고객 생애가치)

기준으로 상품을 정리한다

• 사람이 반복적으로 판단하던 업무는 AI에 맡긴다

• ‘작년에도 그랬다’는 이유로 유지되던 정책을 폐기한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전제 조건이 있다.


데이터가 문제를 드러냈을 때,

그 사실을 말한 사람이 보호받아야 한다.


실패는 용서할 수 있어도,

침묵은 조직을 망친다.


AI는 실패를 줄여주지만,

침묵하는 조직은 구하지 못한다.


AI는 사람을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다.


사람이

덜 틀리게,

더 빠르게,

더 일관되게,

더 똑똑하게 판단하도록 돕는 장치다.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조직은

사람을 더 뽑지 않고,

회의는 줄고,

실험과 폐기의 속도는 빨라진다.


이것이

AI·데이터 시대의 신경영이다.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남긴다.

이 질문은

AI의 성숙도가 아니라

조직의 성숙도를 묻는 질문이다.


당신의 조직에는

데이터가 맞는지, 틀렸는지를 검증할 사람이 있는가.


그리고

그 데이터가 맞다면,

그 데이터에 비추어

의사결정이나 일하는 방식이 틀렸을 때

틀렸다고 소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람은

조직 안에서

정말 안전한가.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조직은 아직

미래를 선택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