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옥 이전과 어느 봄날의 기록
회사가 이사를 했다.
생각보다 기존 장소에 마음이 많이 남았다.
정든 역삼을 떠난다는 건,
단순히 공간을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익숙한 골목, 단골 점심 식당, 몸이 기억하는 출근길.
사람은 결국 익숙함에 마음의 뿌리를 내리는 동물인가 보다.
이사 첫날,
낯선 공기 속에서 선정릉 담장 길을 따라 걸었다.
긴장으로 팽팽했던 마음의 매듭이 그 길 위에서 조금씩
풀렸다.
담장 너머로 세월을 버틴 고목들이 서 있다.
이곳에는 조선의 왕들이 잠들어 있다.
법전 『경국대전』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운 성종,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정현왕후.
조금 떨어진 곳에는 반정의 소용돌이 끝에 왕위에 올랐던
중종이 홀로 묻혀 있다.
500년 전의 시간이 이 땅에 그대로 스며 있다.
조선의 왕이 잠든 자리 위로,
2026년의 봄볕이 아무렇지 않게 내려앉는다.
역사는 거창한 기록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밟는 흙 위로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새 사옥 근처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누가 미리 심어둔 것도 아닐 텐데,
마치 이사 온 우리를 기다려준 환영 인사 같았다.
흰 꽃잎들이 햇살을 머금고 조용히 흔들리는 모습에 가만히 눈을 맞춘다.
봄은 이미 이곳에 먼저 와 있었다.
요즘 우리의 점심시간은 이전과 사뭇 달라졌다.
서둘러 밥을 먹고 나면,
동료들과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선정릉 길로 향한다.
대단한 비즈니스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다.
그저 걷는다.
왕의 능이 있는 이 길이 도심 한복판에 지금껏 살아남은 건,
아마 이곳이 우리에게 오래도록 지켜져야 할 숨결이 머무는 자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꽃잎 사이로 스며드는 맑은 볕을 받으며,
아까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복잡한 보고서와 숫자들을 잠시 내려놓는다.
그 짧은 20분의 산책이,
다시 오후를 기쁘게 살아낼 힘이 된다.
누군가 ‘복지’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높은 연봉이나 화려한 제도를 떠올린다.
물론 그것들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매일 점심,
500년의 시간 옆을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것.
흐드러진 봄날의 벚꽃을 동료와 함께 올려다보며 감탄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이런 것들도 분명한 복지라고 믿는다.
어쩌면 가장 조용하게 스며들어,
우리 기억 속에 가장 오래 남을 종류의 복지 말이다.
새로운 보금자리,
더 좋아진 환경이 더 좋은 일들로 이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혹시 선정릉 근처를 지나신다면,
서두르는 발걸음을 늦추고 담장 길을 한 번쯤 천천히
걸어보시길 권한다.
왕들이 잠든 깊은 시간 위로,
우리의 봄은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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