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가 사라진 자리에 경쟁만 남았다 (7)

— 아이들의 자유 놀이가 사라진 사회, 약해지는 공동체

by Jace

나와 윗세대 다수, 그러니까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대체로 형제가 많은 집에서 자랐다.형제가 셋, 넷은 흔했고 다섯 명인 집도 드물지 않았다. 방은 혼자 쓰기보다 함께 쓰는 경우가 많았고, 전용 책상이나 의자가 없어 작은 밥상을 앞에 두고 공부하기도 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분명 불편하고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렇다고 그 시절이 더 좋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안에는 지금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공동생활의 훈련’이 스며들어 있었다. 공간을 나누고, 순서를 정하고, 양보하고, 다투고, 다시 화해하는 과정이 일상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과 감정 조절을 몸으로 익히는 환경이 있었다.


내가 자란 거제도 시골에는 학원이 거의 없었다. 도시에도 대입 재수생이 다니는 학원이 주를 이뤘을 뿐, 1980년대에는 재학생의 과외나 학원 수강이 제도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적어도 공공연히 허용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방과 후 국민학생들의 일상은 또래들과 어울려 밖에서 노는 것이었다.


팽이 돌리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제기차기, 땅따먹기, 비석치기, 진돌, 고무줄놀이, 줄넘기,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연날리기…. 아이들은 흙과 나무, 들풀과 공터를 오가며 놀았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어기면 다투고, 다시 합의했다. 누가 심판이 될지, 팀을 어떻게 나눌지, 다친 친구를 어떻게 배려할지도 아이들 스스로 결정했다. 놀이 속에는 작은 사회가 있었다.


부산으로 전학을 온 뒤에야 전자오락실, 만화방, 비디오방 같은 실내 문화를 접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혼자 소비하는 활동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함께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경험이었다. 학교를 마치면 운동장이나 공터에 모여 축구와 야구를 하고, 여자아이들도 고무줄놀이나 피구, 공기놀이를 즐겼다. 놀이의 핵심은 결과나 평가가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과정 그 자체였다.


지금 아이들의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스마트폰과 PC, 모바일 게임이 일상 깊숙이 들어왔고 방과 후 시간은 학원 이동과 숙제, 관리형 활동으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 특히 대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또래끼리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 기회가 거의 없다. 형제 없이 혼자 자라는 아이들이 많고, 있어도 두 명을 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문제의 본질은 단순히 놀이 시간이 줄었다는 데 있지 않다. 성인의 개입과 평가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자유 놀이’, 그리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던 갈등 조정과 관계 회복의 경험이 구조적으로 사라졌다는 데 있다.


요즘 아이들도 협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 게임, 프로젝트 수업, 동아리 활동 속에서 협력은 여전히 이루어진다. 다만 그 대부분은 규칙과 목표, 보상과 평가가 미리 설계된 관계다. 반면 과거의 자유 놀이는 승패보다 관계가 더 중요했다. 싸워도 다음 날 다시 같이 놀기 위해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해야 했다. 이 차이가 사회성의 질을 바꾸고 있다고 느낀다.


더 우려되는 점은 아이들 관계마저 점점 ‘전략적’으로 관리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아이가 누구와 친해지면 좋겠다”는 부모의 계산이 앞서고, 수영·축구·농구·테니스 같은 체육활동조차 전문 학원과 연계해 관리된다. 아이들이 스스로 관계를 만들고 깨지고 다시 잇는 경험은 줄어들고, 관계는 어른의 판단에 따라 쉽게 평가되고 교체된다. 친구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스펙의 일부처럼 취급되는 순간 관계는 얕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변화는 학교폭력 이슈의 확대와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과거에도 폭력과 괴롭힘은 있었다. 다만 오늘날에는 신고와 기록, 미디어 노출, 온라인 괴롭힘을 통해 문제가 훨씬 빠르고 넓게 확산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아이들이 갈등을 완충해 줄 친밀한 또래 네트워크와, 갈등 이후 회복을 연습할 기회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놀이는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아이들이 사회를 배우는 가장 중요한 훈련장이었다.


이 문제는 개별 가정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시간 나면 놀게 하자”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사교육과 입시 중심의 시간표가 아이들의 성장 구조 자체를 바꿔버린 결과다. 경쟁의 필요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쟁이 아이들의 전부가 될 때,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와 맞물려 우수 인재가 의대·치대·약대·한의대 등 소수의 안정적인 진로로 과도하게 쏠리는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는 개인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다양성과 도전의 토양을 약화시킬 수 있다. 기초과학, 공학, 인문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구조가 있을 때 사회의 혁신 역량도 유지된다.


노벨상 수상 여부가 국가 경쟁력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그러나 상징적 지표로 보자면, 우리는 평화상과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음에도 과학 분야에서는 아직 성과가 없다. 일부 대학이 국제 랭킹에서 100위권 내에 들고는 있지만, 연구 생태계의 질적 경쟁력과 장기적 축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고민이 필요하다.


정리하면,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풍요롭고 인프라도 좋아졌지만 아이들의 성장 환경은 오히려 더 고립되고 경쟁적으로 변했다. 공동생활과 자유 놀이가 만들어주던 사회성의 기초 체력이 약해진 자리를 스마트폰과 사교육, 관리형 활동이 채우고 있다. 그 결과는 고립, 불신, 공동체의 약화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아이들을 더 몰아붙이는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점수만 잘 받는 개인이 아니라, 갈등을 견디고 관계를 회복하며 함께 살아갈 줄 아는 시민으로 자라도록 사회의 구조를 돌아보는 일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더 요구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무엇을 조용히 빼앗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