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유통·제조 SCM의 진화 (47)
패션·유통·제조 산업에서
SCM이 경영혁신의 핵심 방법론으로 주목받던 시기,
현장에는 하나의 메시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계획대로 실행하라(Execute as Planned)”는 말이다.
시즌 초에 수립한 판매 계획과 생산 계획, 매입 물량과 납기 스케줄을 기준으로 조직이 움직이고, 시즌 종료 후에는 계획 대비 실적 차이를 분석해 다음 시즌의 정확도를 높이자는
접근이었다.
트렌드 변화 속도가 지금보다 완만했고,
오프라인 채널 중심의 사업 구조가 비교적 안정적이던
시절에는 이 방식이 실제로 성과를 냈다.
당시 SCM은 분명한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시즌 초 MD가 수립한 수요 예측이 비교적 유효하며,
생산·물류·영업은 그 계획을 최대한 흔들림 없이
실행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믿음이다.
시즌이 끝나면 “왜 팔리지 않았는가”,
“왜 재고가 남았는가”를 계획과 실행의 차이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다음 시즌 계획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조직은 학습했다. 이른바 ‘계획–실행–분석–개선’의 선순환 구조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패션·유통 환경에서 이 방식은 점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시즌이라는 개념 자체가 흐려졌다는 점이다. 기후 변화로 계절 수요는 예측하기 어려워졌고,
SNS와 디지털 채널을 통해 트렌드는 시즌 중에도 급격히
변한다.
자사몰, 외부몰, 라이브 커머스 등 판매 채널의 다변화로
오프라인 기준으로 세운 계획은
온라인에서 빠르게 무력화되기 쉽다.
이런 환경에서는 “계획대로 실행”이
오히려 리스크가 되기도 한다.
시즌 초 수요 예측을 기준으로 생산한 물량이 실제 트렌드와 어긋났음에도,
계획을 수정하지 못한 채 생산과 출고를 이어가면
재고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반대로 온라인에서 특정 아이템이 빠르게
반응을 얻고 있음에도, 초기 계획에 없다는 이유로
리오더 판단이 늦어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흔하다.
문제는 실행력이 아니다.
계획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지점에서 AI와 데이터 기반 SCM은
기존 방식을 부정하기보다,
이를 현실에 맞게 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차세대 SCM의 핵심은 더 이상 시즌 초에 완성된
‘정답 계획’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판매가 진행되는 동안 계획을 계속 수정·보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자사몰과 외부몰의 실시간 판매 데이터, 상품별 전환율과
반품률, 고객의 검색·클릭 데이터, 여기에 날씨와 프로모션 정보까지 결합되면 AI는 특정 상품군의 수요 변화를
기존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감지할 수 있다.
이는 ‘사후 분석’이 아니라 ‘진행 중인 의사결정’을
바꾸는 데이터다.
예를 들어 시즌 중 특정 소재나 실루엣의 반응이 예상보다
빠르게 꺾이고 있다는 신호가 포착되면,
AI는 추가 생산 중단이나 물량 재배분 시나리오를 제안할 수 있다.
반대로 온라인에서 특정 SKU가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면,
초기 계획에 없던 리오더 가능성과 물류·납기 영향을 동시에 시뮬레이션해 의사결정 속도를 높인다.
중요한 점은 AI가 결정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MD·생산·영업이 더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계획은 더 이상 고정된 기준점이 아니다.
계획은 실시간 데이터에 따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동적 기준선(dynamic baseline)이 된다.
성과 관리 역시 “계획 대비 달성률”보다,
변화 신호를 얼마나 빨리 포착했고 그에 따라
생산·물류·가격·채널 전략을
얼마나 합리적으로 조정했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결국 패션·유통·제조 분야에서 차세대 AI 기반 SCM이
지향하는 바는 분명하다.
과거처럼 ‘처음 세운 계획을 얼마나 잘 지켰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시즌 중 끊임없이 변하는 수요와 시장 신호에
얼마나 민첩하고 정교하게 대응했는가를 경쟁력의 기준으로삼는 것이다.
“계획대로 실행”이라는 과거의 슬로건은 이제
“데이터에 따라 계획을 바꾸면서 최적의 실행을 선택한다”는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