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골목에서 했던 놀이 중에 이런 게임이 있었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 밥 먹는다.”
“무슨 반찬? / 개구리 반찬”
“살았니? 죽었니? / 살았다~”라고 대답하면서 상대편 친구를 덮치는 게임이다.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재미로 했던 단순한 놀이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놀이 속의 질문은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 살아 있는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그대도 동일한 질문을 지금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Yes이든 No이든 그 대답의 이유도 함께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오랜 시간 많은 십대들과 이 질문에 대해 함께 토론했다. Yes라고 대답하는 학생들의 공통적인 대답은 “숨을 쉬고 있다.” “생각하고 있다.” “보고 있다.” “듣고 있다.” 등이었다.
그러면, 이어서 다른 질문을 한다.
만약 지금, 그대의 왼쪽에는 강아지가 있고, 오른쪽에는 인공지능 로봇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대가 강아지나 인공지능 로봇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살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두 번째 질문에도 많은 십대들은 적절한 대답을 찾기 어려워했다. 강아지도 숨을 쉬고 움직인다. 인공지능 로봇도 생각하고 느낌을 표현한다. ‘사람으로서 살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는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질 것 같다.
왜 우리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 ‘숨을 쉰다’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지구 상에 수많은 동식물들이 호흡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식물들은 광합성을 하여 이산화탄소는 받아들이고 산소를 내어 주며 인간과 지구환경에 이로움을 주고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라는 대답도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한다는 말인가? 십대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들이 정말 '생각'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들인가? 그런 류의 생각들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동물들의 사고 수준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아직 어려서’라는 변명 속에 숨지 말기를 바란다. 이것은 나이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주변에 있는 어른들에게 위의 질문들을 해 보아도, 비슷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이것은 나이라는 숫자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깊이 생각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이다. 십대인 그대는 생각해야만 하고, 또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대는 결코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할 만큼 어리지 않다. 어리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거짓말이다.
그대의 생각을 이것저것에 분산시키지 말고, 이러한 질문에 집중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분명히 그대가 투자한 노력보다 훨씬 더 큰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십대들로 하여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못한 것이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할 뿐이다.
대부분의 어른들도 ‘살아 있다’는 기준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그리고 수 없이 많은 활동들을 하고, 밤에 잠이 든다. 그대가 학교에 가면 정해진 시간표를 따라 별생각 없이 그냥 사는 것처럼, 어른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게 하루, 한 달, 1년이 가는 것이다.
‘살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잘 살았다’, ‘못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평가 기준도 불분명하다. 먼저는 살아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 그 삶이 어느 정도 잘 살았고, 못 살았는지를 판단해볼 수 있다.
오늘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일을 하며 바쁘게 살았지만, 그 삶이 정말 살아 있었던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래서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지 못한다. 결국 삶이란 살아있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아름답고 멋진 삶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살아 있다’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일단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 있다’라는 토대 위에, 다른 무언가를 세워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만의 구분 기준을 세워야 한다.
동물과 인공지능 로봇, 사람이 존재하는 방식은 다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동물이 존재하는 방식은 ‘생존’이다. 생존은 본능에 충실한 존재 방식이다. ‘먹고, 자고, 싸고’를 반복할 뿐이다. 이 3가지 활동을 안정적으로 지속하며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인공지능로봇(AI)은 ‘작동’하는 것이다. 인공지능로봇은 생명체가 아니다. 인공지능로봇 스스로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며, 인간 이상의 기능을 발휘한다 할지라도 로봇은 기계일 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삶’이다. 삶은 동물이나 로봇에게는 성립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부여된 고유의 영역이다. 삶은 '살아 있다'의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다'의 기준을 세운다는 것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길이다.
삶은 벽에 결려 있는 아름다운 풍경의 그림이 아니다. 삶은 그 그림이 표현하고 있는 풍경 그 자체이다. 틀에 박힌 고정된 모습이 아니다. 삶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생명의 움직임이다. 그래서 ‘살아 있다’의 기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경험함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높은 표준을 세우고, 그것을 지켜 갈 때에만 삶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너무나 쉽게 먹고살기 위한 ‘생존’이나 어떤 기능을 반복하는 ‘작동’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어른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살맛이 안 나”
“숨 막힐 것 같아”
이런 말들은 모두 자신의 살아 있는 상태에 대한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몸은 분명히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데, 마음으로는 마치 죽을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러한 증상을 호소하는 것을 보면, 사람의 생명이 몸에만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은 몸의 생명과 마음의 생명으로 구성된다. 몸과 마음은 분리할 수 없는 통합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지만, 각각의 고유한 영역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몸과 마음의 구분을 자각하지 못하고 뒤엉켜서 살아가고 있지만, 생존이 아닌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구별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구별을 인식했던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참을 달려가다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 영혼이 따라오지 못해 잠시 멈추어 서있다고.”
몸과는 다른, 마음에 대한 구별된 인식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영혼이 몸을 떠난 상태’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이치이다.
모든 생명은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생명의 필요를 가지고 있다. 몸의 생명은 의식주를 필요로 한다. 그 필요가 적절하게 채워지지 않으면 몸의 생명은 위협받게 된다. 춥고 배고프면, 그 몸은 따뜻한 온기와 먹거리를 찾는다. 이와 똑같이 우리의 마음도 생명의 필요를 가지고 있다. 의식주로는 마음의 생명이 가진 필요를 채워 줄 수 없다. 사람은 밥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의 생명은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몸과 마음에는 각각 다른 생명의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적절하게 공급해주지 않는다면, 생명 유지는 위태로워진다.
사람의 마음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몸이 장기와 기관 등으로 구성되는 것처럼, 마음도 생각, 감정, 의지로 구별하여 볼 수 있다. 몸과 마음의 통합처럼, 생각・감정・의지도 통합되어 있다. 그 각각은 또 다른 필요를 가지고 있다. 우주의 질서처럼, 사람의 몸과 마음은 또 하나의 작은 우주로서, 너무도 신비한 하모니와 심포니를 이루며 돌아가고 있다. 몸과 마음의 콜라보는 정말 우주적이고 예술적이다.
몸과 마음의 우열을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냐 개란이 먼저냐’처럼,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다. 몸이 없는 마음, 마음이 없는 몸을 생각할 수없듯, 똑같이 중요하다. 다만 질서와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의도적으로 먼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마음의 필요이다. ‘배고프다’, ‘잠 온다’ 같은 몸의 필요는 쉽게 감지가 되지만, 마음의 필요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몸과 마음의 관계 때문에도 그러하다.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며, 표현하는 수단이다. 마음의 작용 없이, 몸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에서 '앉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몸이 스스로 앉는 경우는 없다. 이것이 사람이 가진 생명의 질서이다. 마음의 생명을 잘 관리하여 몸의 생명도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건강한 신체를 단련해야 하는 필요는 건강한 정신이 깃들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사람의 몸속에서 마음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마음의 움직임이 몸으로 제한받지 않고 표현될 때, ‘살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살아 있다'의 본질이다. 그 역동적인 움직임의 정도가 '살아 있다 '의 상태를 반영하며, 그것이 생명력이다. 생명의 상태를 나타내는 생명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생명력이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도 있다. 생명력은 단 한순간도 멈춤 없이 계속해서 변화한다. 이러한 생명의 상태는 4가지 단계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위에서 제시한 각각의 상태에 대해서는 다음장부터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빅 퀘스천 위에, 하나하나의 작은 질문들과 답을 올려놓고 퍼즐들을 맞추어나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