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침표 앞에 서서

by 오 마이 캡틴


인간의 두뇌는 가상과 현실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레몬즙을 먹는다고 상상하면, 두뇌에서 침샘이 자극받아서 입 안에 침이 생긴다.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삶의 마침표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 현재를 살면서도 미래를 경험하는 효과는 얼마든지 맛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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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침표 앞에 서는 경험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28살의 젊은 나이에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장에 서게 된다. 집행관은 5분 뒤에 사형을 집행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살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뿐이다. 5분 뒤면 모든 것이 끝난다. 5분 동안 그에게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며,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타오른다. 5분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동일하지만, 어떤 위치에서 5분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5분이 끝나갈 때쯤,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진다. 황제가 사형수들을 사면하고, 유베지로 보내라는 전갈이 도착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생의 마침표 앞에 섰던 그날의 느낌을 동생에게 편지로 써 보낸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고 실수와 게으름으로 허송세월 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하다. 인생은 신의 선물. 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 수도 있었던 것을 조금 젊었을 때 알았더라면 이제 내 인생은 바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이후 4년간의 수용소 생활 동안 그는 혹한의 추위와 감시, 배고픔, 족쇄가 채워진 상황 속에서도 소설을 완성해 나갔다. 편안하게 앉아서 글을 쓸 시간이나 공간, 심지어 종이도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암기해 나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작품들이 《죄와 벌》, 《까르마초프의 형제들》과 같은 불후의 명작들이다. 한 인간에게서 이토록 초인적인 힘이 솟아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있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가지는지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백치》라는 소설에서 수용소 생활을 회고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언제나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뿐이다.” 그에게 인생은 ‘5분의 연속’이었다.


삶의 마침표 앞에 서게 될 때, ‘유한한 시간’이라는 인간 실존의 조건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 이러한 발견은 시간의 가치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그 한계치 안에서 최대치를 발현시킬 수 있게 된다.


나의 인생에서도 처음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느껴 본 경험은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군 복무 중에 휴가를 받았을 때의 일이다. 군인들에게 휴가는 정말 소중하고 달콤한 시간이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 시간의 여유를 만끽하고 싶어 한다. 나도 집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며 정말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하늘도 유난히 더 맑아 보였다. 그런데 그 평화로운 하늘에 비행기 한 대가 너무 가까이서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분 뒤 TV에서 비행기 불시착에 대한 속보가 나왔다. 그때 내가 왜 그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행기가 불시착한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정말 아수라장이었다. 내가 뛰어들어가 구조활동을 할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다만 그저 숲에 주저앉아 사람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이 사건은 탑승객 129명이 사망한 2002년 경남 김해 중국 국제항공 129편이 추락한 사고이다. 그 사건을 통해 나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삶과 죽음에 대한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내가 그 날 그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지 않고, 방송을 통해서만 그 사건을 접했더라면, 삶과 죽음이 그토록 생생하게 다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알고 싶은데, 책과 영상만으로는 어떤 한계가 느껴진다면,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 보자. 새벽 응급실에는 각종 응급사고 환자들이 몰려온다.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사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 대성통곡하는 사람, 보호자나 의료진과 싸우는 사람... 죽음으로 가기 싫어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응급실 한 켠에는 죽음에 저항할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온몸에 갖가지 호스를 연결해 놓고 ‘쌕쌕’ 거리는 숨소리만을 내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 앞에는 작은 모니터 화면이 있고, 숫자가 나온다. 그 숫자가 0이 되어버리면 그 사람의 삶은 끝나는 것이다. 이러한 장면들을 목격하며 그 현장에서 느껴지는 생과 사의 의미를 기록해보자. 누군가 와서 제지를 하며 뭐하는 분이냐고 물어본다면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려보자.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싶어 왔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방해가 되지 않을 테니, 30분만 더 있게 해 주세요.” 그래도 쫓아낸다면, 다음 주에는 다른 병원 응급실로 가보자. 죽음과 삶의 의미가 와 닿을 때까지.


이런 비정상적인 권면을 하는 것이 너무 극단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권면을 하는 이유는 삶과 죽음을 너무나 막연하게 여기는 사조가 훨씬 더 극단적인 비정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실제로 응급실을 가느냐 안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응급실로 달려갈 만큼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함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나의 비정상적 권면은 그대가 가진 절박함의 정도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맹모에게도 그런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에, 자녀교육을 위해 무덤 근처로 이사를 가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긴박한 치료행위가 이루어지는 병원 응급실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찾아가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편안히 앉아서 눈으로 글자를 읽는 것으로는 느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몸으로 직접 부딪혀보는 자극이 필요한데... 어디에 가서 이런 경험을 해 볼 수 있다는 말인가?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더 절박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더 절박한 심정으로 책을 읽고, 삶을 관찰하며, 어른들과 대화해야 한다.



❚ 삶의 도중에 마침표 찍기?


삶의 마침표는 언제 찍어야 하는가? 주어진 삶을 모두 다 살았을 때 찍어야 한다. 삶이 다 마쳐지지도 않았는데, 중간에 마침표를 찍는다면, 그동안 애써 살아왔던 삶 전체가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의 문장을 쓸 때, ‘나는 너무 힘들어서’라고 써 놓고, 마침표를 찍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면, ‘나는 너무 힘들어서’ 어떻다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다음을 설명해주는 말이 이어져야 한다. “나는 너무 힘들어서, 포기할 뻔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서 빛나는 메달을 받았다.”는 문장이 완전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의 문장을 쓸 때 조차도 그 의미를 정확히 전달되고자 하는데. 우리의 인생이 한 줄 문장보다 못한 대우를 받도록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삶을 다 마치기도 전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OECD 국가들 중에서 10년 연속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로 기록되었다. 통계자료를 보면 하루에 44명이 매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자살을 했다. 십대 청소년들의 사망원인도 자살이 첫 번째이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삶을 다 마치지기도 전에 마침표를 찍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본질은 하나다. 사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너무 좋아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고, 그 어려움을 더 이상은 견뎌 낼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살의 이유는 삶의 어려움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세계 최초로 췌장암 조기진단법을 계발한 십대 소년 잭 안드라카가 화장실에서 자살을 하려 했을 때, 자신의 미래를 알았더라면 그런 선택을 했었을까? 그렇지 않다. 전 세계의 수많은 췌장암 환자들과 잠재적 환자들을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자기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의 핵심은 어려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 너머의 희망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이다. 삶을 관조하는 안목은 절망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희망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안목은 하루아침에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삶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해를 쌓아갈 때, 그래서 자신만의 인생론이 정립될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결국, 삶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삶의 도중에 마침표를 찍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 시도를 했다고 고백한다. 그들의 화려함 뒤에 그런 어둠이 있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로 손꼽히는 칼 포퍼(K. R. Popper )의 말처럼,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룰루랄라 하며, 아무런 걱정 없이 꽃길만 걷는 인생은 없다. 평범하게 사는 일반인들조차도 1~2번쯤은 자살을 생각할 만큼 어려움을 겪는다. 나도 그랬다. 인생에서 어려움은 피해 갈 수 없는 관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그 어려움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을 갖기를 바래야 한다. 아무리 힘든 삶의 순간에도 그 순간을 견뎌 낼 수 있는 삶의 의미는 항상 기다리고 있다. 그 의미를 발견하면 우리는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러므로 부모님의 그늘 아래 보호받는 십대의 때에 삶의 의미를 찾는 안목을 계발해야 한다.


이러한 안목을 계발하면, 그대의 삶에 놓여있는 무수한 난관들을 넘어가고 삶의 무게를 감당해 낼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많은 사람들의 고통까지도 함께 짐 지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삶의 의미를 찾는 안목을 계발하는데 게을리한다면, 그대가 충분히 통과할 수 있었던 어려움 때문에 포기하게 되는 일이 생길 것이다.


근대 세계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 들일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는 고문과 고통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지옥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빅터 프랭클은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았고, 그 삶의 의미가 어떤 고통도 견뎌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겠노라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는 《죽음의 수용소》라는 저서와 ‘의미 치료’라는 새로운 상담이론을 통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었다.


이 지구촌에는 더 나은 내일에 대한 아무런 기대를 가질 수 없는 상태로 오늘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도와 아프리카의 어느 길바닥에는 쓰러져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있고, 전쟁과 노동에 동원되는 십대 아이들이 있다. 우리에게 있는 삶의 무게는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지고 감내하는 사람들이 있고, 더 가벼운 무게를 지고도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대는 어떤 편에 서 있고 싶은가? 적어도 자기 자신보다 더 큰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서고 싶다면, 절대 우리 스스로 삶의 마침표를 먼저 찍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십대 청소년들이 인생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최악의 선택이다. 더 이상의 나쁜 선택은 있을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자기 삶의 변화와 발전 가능성에 대해 여기 까지라며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그대들의 약점과 환경적 어려움은 반드시 아름다운 보석으로 승화될 것이다. 그대의 어려움을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이다.



❚ 삶의 끝자리에 놓이는 마침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은 무의미하다. 죽음에 대한 모든 이해는 우리의 삶에 새로운 통찰을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죽음은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태어난 적이 없었던 사람은 죽음도 경험할 수 없다. 살았기 때문에 죽음도 있는 것이다. 엄마의 뱃속에서 낙태된 아이들처럼, 생명을 얻을 기회가 없었던 존재는 죽음도 맞이할 수 없다. 죽음은 산자의 특권이다. 또한 무생물은 죽음이 아니라 소멸될 뿐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산자가 살아왔던 모든 삶의 절정이다. 여러 가지 사건과 반전 속에서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를 보며, 관객들이 감동을 받는 것처럼, 죽음은 삶에 있어서 그러한 장면이 된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삶을 완성했던 사람이 누리는 안식이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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