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죽는다.
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도 죽는다.”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명체는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고정불변의 사실이다.
우리는 언젠가 한 번 태어난 적이 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죽는다. 나라는 존재가 없던 세상에 어느 날 갑자기 ‘무에서 유’로 나타난 것처럼, ‘유에서 무’로 사라지는 날이 있다.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기 마련이다.
여러 가지 단어들의 조합들로 어떤 뜻을 나타내는 하나의 문장이 끝날 때, 그 문장 마지막 글자의 귀퉁이에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우리 삶에도 그런 마침표와 같은 한 날이 찾아올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모든 삶은 죽음을 껴안고 있다. 죽음이 없는 삶은 없다. 이것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삶의 신비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인생은 삶과 죽음이라는 양면이 하나로 존재하고 있다. 죽음은 인간 실존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죽음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삶에 대해서도 온전한 이해할 수 없다. 죽음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그리 많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삶과 한 짝을 이루고 있는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삶에 대한 무관심이다. 죽음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은 삶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자며 '웰빙'well-being을 추구했던 그들이, 실상 삶에 대해서 무관심했다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나마 노인층들 사이에서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서 다행이다. 그나마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한 번쯤은 진지하게 돌아보는 기회를 갖고 세상을 떠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인생의 마침표를 목전에 두고서야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한 번뿐인 인생에서 너무도 아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관심은 결코 죽음 그 자체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어떤 방법으로 임종을 맞이할 것인가의 고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죽음에 대한 모든 관심은 삶을 지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관심과 올바른 이해는 누구에게 더 필요한가?
그것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적은 노인들이 아니라, 서술할 수 있는 삶의 문장이 훨씬 더 많이 남은 십대들이다. 이들은 이제 인생의 첫 문장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인기 드라마의 다음 편 방송이 궁금하여 시청자들이 안달을 내는 것처럼, 세상은 그대가 어떠한 인생 스토리를 써나갈 것인지를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십대들은 죽음에 대해 관심이 없다. 십대 청소년이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음에 관련된 책과 강연을 찾아본다면, 주변에서 어떤 반응이 나오겠는가? 아마 백이면 백, 불안해할 것이다.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며 상담을 권유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풍토이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환영받지 못한다. 죽음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미지의 사건이며, 산자의 관심 밖에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십대들이 죽음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십대들에게 죽음은 너무나 먼 별나라 이야기이다. 죽음이란 주제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왜? 살아갈 날들이 아직 너무 많고, 죽음은 너무 멀리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갈 날들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장 많은 관심이 필요한 것이 죽음이 가진 역설이다.
또한 죽음은 항상 순차적으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놓여서 안된다. 그대는 선택해야 한다. 어른들과 사회풍토를 비난하며 죽음에 대한 무관심을 계속 합리화하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내 인생은 내 것이라며, 다부지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지 말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쓰고 있는 색안경을 언제까지 쓰고 있을 것인가? 이제는 벗어버리자. 그대가 십대라면 죽음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고, 자신만의 생각을 형성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가 되었다. 자신을 작고 어리게만 보지 않기로 하자. 그대는 ‘작은 성인’, 아직 성인에 이르지 못한 미성숙한 진행형의 존재가 아니다. 그대는 우리 앞 세대들이 이루어낸 위대한 성취 그 이상의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다. 사회의 시류 때문에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지 말자.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을 존중하는 문화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개발시켜야 한다. 대부분의 십대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진정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또한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사과하고 싶은 부분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례하거나 일탈적인 행동을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가 어른과 동등한 한 명의 인격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권위와 질서를 따르는 것은, 그것을 존중하는 마음 때문이지, 그대가 무언가 부족하고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대의 가능성을 북돋어 주는 사회환경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여 신세 한탄하며 체념한 채로 주저 않아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현실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현실에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다.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사유하는 십대가 되는 길은 대세를 역행하며, 소수의 편에 서는 선택이기 때문에 마음을 더욱 단호하게 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에게 주어진 삶을 올바른 위치에서 다시 조망해 보아야 한다. 삶을 조망할 수 있는 올바른 위치는 인생의 마침표 앞에서이다. ‘끝을 보고 시작하라’는 격언처럼, 현재 시점이 아닌 삶의 마지막 시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설계해 보자.
언젠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끝이 온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식하는 사람만이 현재의 삶에 순간순간을 충실히 살 수 있다. 과거 로마시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의 뒤에서 한 노예가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라고 외치는 풍습이 있었다. 그 말은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였다.
전쟁에 승리하여 돌아온 장군에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고, 한편으로 보면 매우 불쾌한 저주처럼 들리는 이야기이다. 마치 자신이 정말 원하던 명문대학에 어렵게 입학하여 기뻐하는 학생에게 누군가가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그러면 그 학생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아마 대부분이 재수 없다며 소금을 뿌릴 것이다. 그러나 승리와 죽음을 대비시킨 것은 장군의 지혜이다.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는 소리는 장군으로 하여금 승리에 도취되어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죽음에 대한 기억이 그가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된 것이다.
전 세계의 4분의 1을 정복하며 광활한 대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그 작은 모기에 물려 죽음을 당한 역사를 볼 때에, 메멘토 모리의 중요성은 더 분명해진다. 스티븐 잡스도 자신의 성공 비결에 대해 메멘토 모리를 언급한다. 그는 열일곱 살 때부터 33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스스로에게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던 일을 할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그리고 그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졸업연설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내가 곧 죽을 몸이라는 생각은 제가 뜻밖에 획득한 가장 중요한 도구였고, 선택의 고비에서 늘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기대나 자부심, 당혹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모두 죽음 앞에서 떨어져 나가고 정말로 중요한 것만 남으니까요. 죽을 운명이라고 유념하면 무언가 잃을 게 있다는 생각의 덫을 가장 확실히 피해 갈 수 있습니다. "
자신의 끝을 인식하는 사람은 오늘을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게 된다. 자기 스스로를 앞날이 창창한 개선장군처럼 여기고 죽음은 멀게만 보고 있는 십대들에게도 누군가 ‘메멘토 모리’라고 외쳐 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