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삶 사이에는 그 경계가 불명확한 2가지 생명 상태가 있다. ‘살아 있다’고 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죽었다’ 고도 볼 수 없는 애매한 상태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삶은 본디 계속 살아 움직이는 것인데, 그 움직임이 멈추어버린 것이다. 문장에서의 쉼표는 그다음 내용으로 도약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것이지, 쉼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삶의 쉼표는 그다음을 잃어버린 채, 멈추어져 버린 삶의 상태를 나타난다. 첫 번째 삶의 쉼표는 코마이다.
코마상태는 의학적으로 외부의 어떤 자극에 대해서도 반응하지 않는 의식불명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식물인간, 뇌사, 혼수상태라고 부르는 것이다. 코마상태의 사람들은 몸을 만지거나 흔들어도 반응하지 않는다. 눈에 빛을 비추거나 귀에 대고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심장은 뛰고 폐는 숨을 쉬고 있다. 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능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잠을 자고 있는 상태와 비슷하다. 코마는 ‘깊은 잠’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일반적인 수면과 코마의 차이점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코마상태의 환자는 몇 주 또는 몇 년을 이런 상태로 누워있기만 한다.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기록을 보면, 37년간 누워있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살아있다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죽었다고 해야 하는가? 이러한 애매함 때문에 안락사에 대한 찬반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코마 환자는 법적 · 의학적 기준으로 볼 때, 살아 있는 사람이다. 언제 가는 깊은 잠에서 깨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삶은 몸의 생명과 마음의 생명이 모두 활발하게 움직임으로서 유지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코마상태의 환자는 ‘사람으로서 살아 있다’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여 목숨을 보존하고 있을 뿐이다.
코마상태에 빠진 환자의 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다시 움직이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안정적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법적・의학적 기준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코마상태의 경험은 우리 몸에서 정신과 마음의 기능이 멈추어버리면, 얼마나 끔찍한 상태가 되는지 처절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신경외과에서는 이러한 코마상태를 반응의 정도에 따라서 다시 4가지 단계로 구분한다.
그러나 참으로 신기한 것은 20년간 청소년 교육 현장에 있으면서 정상이라고 분류되는 학생들에게서 코마상태의 증상을 너무도 많이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학교 수업시간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고, 질문을 하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 혼돈스러워하고,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한 두 마디 대답으로 일축한다. 너무 코마스럽지 않은가!
코마상태의 기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코마상태의 증상들이 너무 많이 나타났다. 죽음과 코마상태의 구분 기준은 인지적 반응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유무'였다. 그러나 코마상태를 그 반응능력의 '정도'에 따라서 다시 코마상태를 구분하는 의학적 기준을 볼 때, 두 번째 삶의 쉼표상태인 콤마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갖게 된다.
콤마상태는 사람으로서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비교 기준이다. 콤마상태를 분명하게 해야지만, ‘살아 있음’의 상태에 대해서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의 4단계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였고, 죽음과 코마 상태에 대한 개념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했다.
콤마상태는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사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다. 코마상태처럼 의학적으로 정립된 개념이 아니기에, 코마상태와 매우 유사한 상태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병리적 문제라는 진단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십대 청소년들의 상태를 보며 ‘중 2병’이라는 새로운 규정을 만든 것처럼,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콤마상태’라는 새로운 진단 기준이 필요하였다. 코마 'coma'에 알파벳 ‘m'을 하나 더 붙이면, 한 문장에서 쉼표를 의미하는 콤마 ‘comma’가 된다. 즉, 콤마상태는 코마상태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삶의 쉼표 상태를 의미한다.
콤마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필요하다. 코마상태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었다. 반응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반응을 하냐 안 하냐의 문제이다. 신체적 정신적 반응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정상으로 판정된다. “오늘 밥 뭐 먹었어요?”라는 질문에 “김치찌개랑 먹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정상이다. 그러나 콤마상태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기준은 자극에 대한 ‘반응의 정도’이다. 어느 정도 수준의 반응을 하느냐의 문제이다. 그 반응이 얼마나 깊고 넓은 지를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이다.
반응의 정도는 의식의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오케스트라 단체관람을 간다고 하자. 한 학생이 청각을 통해 듣고, 시각을 통해 보았다. 그리고 관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는 의학적으로 정상이다. 코마가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그 학생을 살펴보면, 관람 시간 내내 아무런 미적 경험도 하지 못하고, 지루해하기만 한다. 친구랑 장난만 치고, 빨리 마칠 시간만 기다렸다면, 그 학생은 콤마상태의 증상을 보이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어떤 문제도 발견되지 않는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서 밥을 먹고 준비하여 학교로 이동한다. 수업시간에는 책상에 앉아 있고,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논다. 배고프면 먹으려 하고, 예능 방송을 보면 웃고, 게임하며 집중도 잘한다. 시험기간이 되면 공부도 하고, 끝나면 재미있게 논다. 성적이 낮으면 신경 쓰고, 높으면 좋아한다. 학교, 학원, 집을 아무 이상 없이 잘 이동하고 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또 일주일을 보내고, 일 년을 보낸다. 그렇게 초중고 12년을 모두 통과했다. 의학적 기준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상인이다. 그러나 너무나 일반적이고 평범한 이 십대 청소년이, 콤마상태의 환자일 수 있다. 그가 했던 반응이 너무나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냥 먹고, 그냥 자고, 그냥 학교 갔던 것이다. 공간을 이동하며, 그곳에 잠시 머물렀던 것이지, 그 시간 그곳에서 매우 작게 느끼고 매우 얕게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과정에서 무엇을 얼마큼 느끼고 생각하며 경험했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한 중학생이 ‘2+2’는 아는데, ‘2x2'는 모른다고 하자. 그러면 이 학생은 일반 중학생의 수학능력에 비교하여 볼 때 비정상이다. 행정적으로는 중학생이지만, 수학능력은 초등학생인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학년만 올라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학생의 수학 성적은 0점이 되고, 수학포기자가 될 것이다. 반대로 자신의 수학능력을 인정하고,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다면, 수학 실력이 올라갈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이유는 우열을 나누거나, 정상은 옳고, 비정상은 틀렸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아니다. 정상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이유는 비정상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이다. 콤마상태라는 비정상의 진단 기준이 없다면,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정상이라 생각하고,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은 '삶'을 경험한 적이 없는데, 동물과 같은 생존의 방식으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삶이라고 착각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을 자는 아이들이 있다. 분명히 자는 것을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깨웠는데도, 끝까지 안 잤다고 우긴다. 사태를 파악해보면, 학생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잠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학교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것이 너무나 일반화되었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몽롱한 의식상태이다.
제한속도가 100km인 고속도로에서 사망사고 1위는 졸음운전이다. 수업시간에는 학생들이 의도적으로 잠을 자려고 할 수도 있지만, 어느 누가 고속도로 위에서 일부러 잠을 자려고 하겠는가? 잠이 오면 자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찰나와 같은 순간에 다시 잠들게 되고, 그때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다. 잠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의식이 서서히 몽롱해지면서 잠들게 된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도 그것을 모르는 학생이나 고속도로 위에서 졸음운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잠들기 직전까지 “깨었다. 잠들었다”를 반복하는 몽롱한 상태가 익숙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혼미한 의식상태의 경험이 낯선 것이라면, 그 운전자는 안전한 곳에 주차하고 스스로 휴식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식상태가 익숙하기 때문에 졸음운전을 하면서도 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문제는 낮은 의식 수준이다. 수업시간에 졸거나 멍하게 있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멍하게 있는 것을 인식조차 못한다. 집중한다고 하는 학생들도 그들이 말하는 집중은 집중이 아닌 경우가 많다.
수면에 대해서만 40년간 연구한 수면의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윌리엄 c. 디멘트 박사는《수면의 약속》이라는 저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면부족으로 인하여, 가수면 상태와 같이 낮은 각성 수준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깨어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잠자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 자체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면, 그의 삶에는 어떤 열매가 맺히겠는가?
낮은 각성 수준으로 살아가는 것은 고속도로 위에서 졸음운전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 콤마상태로는 생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을 살기는 어렵다. 생존이 없는 삶은 불가능하지만, 삶이 없는 생존은 가능하다. 삶을 추구하면 생존은 당연히 해결된다. 그러나 생존한다고 해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삶과 생존이라는 결과적 차이를 만들어 는 것이 바로 콤마상태의 의식 수준이다.
코마 상태는 의식 수준 10 미만이다. 예를 들면 혼수상태는 1, 반혼수 상태는 3, 혼미는 6, 기면은 9이다. 의학적으로는 10 이상을 정상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콤마상태의 정상기준에서는 30 이상이 되어야 한다. 11~30까지는 콤마상태로 생존의 방식을 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