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초월하는 삶

by 오 마이 캡틴

삶은 죽음을 초월한다. 사람들이 생존의 문제에 집착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생존과 죽음’을 비교하면, 항상 죽음이 이길 수밖에 없다. 생존은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 오면 ‘생존’은 끝이 나니 당연한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메슬로우도 ‘생존’을 최고의 가치로 만들어 놓았다. 그의 5단계 욕구 이론은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나머지 다른 욕구들은 충족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니까! 죽었는데 학벌이, 연봉이 무슨 소용이 있나?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면 죽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먹는 것이다. 오늘 밥 못 먹으면, 내일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밥벌이’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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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처럼 강한 사람이 되어 더 좋은 밥벌이를 하려고 교육을 받는다. 어렵게 얻은 밥벌이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그렇게 생존경쟁의 치열한 밥그릇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하다. 우리가 죽지 않으려고 산다면, 죽음이 사는 목적이 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혼나지 않으려고 공부한다면, 공부의 목적은 혼나지 않는 것이 된다. 혼이 나냐 안 나냐가 공부를 하냐 안 하냐를 결정짓는다. 반대로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무조건 혼난다면, 그 학생은 공부를 안 할 것이다. 공부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혼나지 않는 것이었는데, 공부를 하든 안 하든 혼나는 일을 피할 수 없다고 하니, 공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죽지 않으려고 산다고 할 때, 무조건 죽는다고 하면 살아야 할 이유도 없어지게 된다. 그런데 죽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는가.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연결되어 있지만 별개의 영역이다. 죽음과 상관없는 살아가야 할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 죽느냐 안 죽느냐는 우리 삶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언제 죽느냐?’의 문제인가? ‘빨리 죽는가? 늦게 죽는가?’ 죽음의 시기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 밥벌이를 열심히 하며 사는 것인가? 빨리 죽는 것과 늦게 죽는 것은 어떠한 차이를 가지는가? 빨리 죽는 것은 나쁜 것이고 늦게 죽는 것은 좋은 것인가? “좋다. 안 좋다”의 판단은 ‘시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쟁을 일으키는 독재자는 빨리 죽는 것이 좋은 것이고, 늦게 죽는 것이 나쁜 것일 수 있다. 반대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찍 죽은 사람들에게는 애도를 표한다. 그는 더 오래 사는 것이 좋은 것이고, 빨리 죽는 것이 후대들에게 안 좋은 것이다. 죽음은 그 자체로 완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죽음의 가치는 그의 삶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 온 것처럼, 삶과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죽지 않으려고, 곧 생존 그 자체를 위하여 살지 않게 된다. 생존은 생존 이상의 가치 있는 목적을 찾아야만 한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생존하기 위해 살게 된다. 그것은 삶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생명을 통해 실현시켜야 할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죽음과 생존의 문제를 초월할 수 있다. 자기가 가진 목숨의 가치가 100이라면, 그는 120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삶이 된다. 그 가치를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순간순간을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삶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냥 거기 있는 것, Being이지, ‘살아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얼마나 '오래' 살았냐 보다 얼마나 '깊이' 살았냐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인생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이런 사람은 이제 육체적 죽음이 아닌 정신적 죽음을 훨씬 더 두려워한다. 콤마상태로 살아서는 ‘생존’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동물적 본능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존과 죽음’이 아니라 ‘삶과 죽음’으로 비교해야 한다. 그러면 삶은 죽음에 대해 항상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가장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카데미 11개 부문 수상작인 제임스 카메룬 감독의 영화《타이타닉》은 죽음을 초월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가르쳐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1912년 당시 초호화 여객선이었던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여자 주인공 로즈는 자신의 가문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약혼을 하였고, 남자 주인공 잭은 도박에서 우연히 얻은 3등석 표를 가지고 타이타닉호에 오른 상태였다. 오늘 날로 치면, 로즈는 재벌 2세와 결혼하여 호화로운 장래가 보장된 상태이고, 잭은 재벌 2세의 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불안정하게 일하는 신세 정도로 보면 된다.


로즈는 외적으로는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삶의 의미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생존’의 상태로 살고 있었다. 반대로 잭은 모든 면에서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영혼의 자유를 맛보며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로즈가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며 바다에 몸을 던지려 하는 순간에 잭이 극적으로 구해주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로즈는 잭을 통해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살아 있다’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잭은 이런 로즈를 보며 ‘삶’을 선물해 주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생겼다.


그런 중에,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게 된다. 잭과 로즈는 선박의 잔해에 의지하여 차가운 겨울 바다에 떠있으면서 구조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있다가는 두 사람 다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잭은 로즈를 설득한다. 여기서 살아남아서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아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로즈 혼자 잔해 위로 올라가도록 희생하여 구조받도록 하고. 잭은 차가운 겨울바다에서 죽어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할머니가 된 로즈가 손자 손녀들 앞에서 타이타닉호에 대해 이야기를 모습이 나온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손자 손녀들에게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라는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감동을 다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잭의 모습은 ‘죽음을 초월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잭과 로즈는 서로 생존하겠다고 싸우지 않았다. 잭은 자신이 생존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 로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잭은 그 가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도 바칠 수 있었다. 그리고 잭은 죽음으로서 로즈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로즈는 더 이상 생존이 아닌, 잭에게 선물 받은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삶의 이야기는 듣는 모든 이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삶은 기록으로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이다. 왜냐하면 그 기록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냥 ‘생존’하며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인생 스토리를 책이나 영상으로 만들었다고 하자.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 한 줄의 기록도 여운을 주지 못할 것이다. 왜? 그냥 학교 가고, 그냥 직장 가고, 그냥 죽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돼지의 생애를 보면서 감동받지 않는다.


죽음 아래 ‘생존’ 하고 있던 상태에서 죽음을 초월하여 ‘삶’을 살아가게 될 때, 공통적인 인생관이 형성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의 말처럼, ‘필생즉사, 필사즉생’, 즉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리라’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많은 대신 관료들이 당리당략에만 빠져 있을 때, 조정의 지원 없이,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조선의 바닷길을 지켜낼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




100척이 넘는 왜군의 침입 앞에서도 단 12척의 배로 세계 함대 역사에서 유래 없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순신의 정신이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큰 가치, 민생의 안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출세만을 생각하는 대신 관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삶은 개인의 만족으로 끝나지 않고, 수천수만 명의 민생들의 목숨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이순신’이라는 한 사람이 없었다면, 그 시대, 그 사람들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멋있지 않은가? 그대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는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라는 의미는 자기 몸 하나의 안위만을 살피는 사람은 정신이 죽으면서, 결국 목숨도 위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죽고자 하면 살리라’는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지 않고, 가치를 따라 산다면, 정신이 살아 있게 되고, 이로서 몸도 살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순신의 삶이 보여주는 위대한 정신이다.


세월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장은 ‘탈출’이라는 짐승보다 못한 선택을 했지만, 어떤 교사와 승무원은 충분히 먼저 탈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구조활동을 펼쳤다. 선장과 승무원 중에서 누가 사람으로서 살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대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인간의 몸은 필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은 불멸한다. 이것이 사람의 존재 방식이다. 선장의 육체는 살아 남았지만, 그의 정신이 남는 것은 그 누구의 기억 속에서도 부정 당했다. 반대로 승무원의 몸은 죽었지만, 승무원이 보여준 정신은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존재하고 있다. 사물은 시간이 지나서 낡으면 폐기처분해 버린다. 그리고 그 사물은 그 누구에게도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과 그가 살았던 삶은 다른 사람들의 가슴 속에 불멸한다. 이순신은 죽었지만, 우리의 가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것이 사람의 존재방식이다.


우리가 이렇게 불멸의 가치를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삶의 의미를 설명할 때, 한 제자가 물었다.


“그러면 선생님은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겠네요?”

“그래, 나는 그런 오늘 하루를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늘 죽음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인 앙드레 말로는 《인간의 조건》에서 “한 인간의 위대함은 언어나 사유가 아닌 죽음을 맞는 모습에서 드러난다.”라고 했다. 죽음을 초월하는 삶의 흔적,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죽음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일생의 모든 순간에서 생존과 가치가 경쟁할 때, 생존을 포기하고 가치를 선택하는 경험이 축적되면서,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다.


중국 2000년 역사를 기록한 사기(史記)에서 사마천은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기도 하고 어떤 죽음은 터럭만큼이나 가볍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사마천이 말하는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도 한 번의 사건이 아닌 삶 전체를 통해 완성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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