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다.

by 오 마이 캡틴

우리는 모두 엄마 배에서 한 번 태어났다. 그러나 위대한 십대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 한 번의 출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첫 번째 출생을 통해서 우리의 몸이 태어나지만, 두 번째 출생을 통해서는 위대한 정신이 태어난다. 오로지 생존만을 위하는 정신에서 위대한 삶을 향한 정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생각의 변화 정도로 느껴지지 않는다. 과거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느낌과 생각을 체험하게 된다. 전혀 다른 세상 같다. 마치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 온 것만 같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빛 가운데 있으면 모든 것이 밝히 보인다.


새로운 본능, 새로운 목적, 새로운 관점, 새로운 태도가 생겨난다. 우리가 처음 태어나는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순간이 얼마나 감격적인 탄생의 순간이었는지, 말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느낌을 그때는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는 순간, 그대는 맛보게 될 것이다.


그동안 무디어져 있던 모든 감각들이 되살아나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게 돌 것이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생각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계속해서 느끼게 될 것이다. 끊임없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생각과 느낌이 만나서 또 다른 생각과 느낌을 창조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의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이 환희, 감격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기 힘들 것이다. 그대는 그 순간 충만하며 완전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탄생이다. 내 안에서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가 태어난 것이다. 이러한 느낌의 경험을 미국의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은 이렇게 표현한다.


“구름 낀 날 황혼의 시간에 눈으로 질척거리는 헐벗은 공터를 가로지를 때, 마음속으로 특별히 행운이 일어나길 빌지도 않았는데 나는 완전한 흥분을 만끽했다. 나는 그저 걱정스러울 정도로 기쁘다.” 《경험으로서의 예술》

다시 태어나는 사건은 어떤 특별한 느낌이나 신비한 경험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 미국 서부 종단 여행을 하거나 히말라야 트래킹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일상을 탈출하여 어떤 이색적인 사건과 특별한 느낌을 느껴보려고 추구하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온 ‘살아 있다’라는 삶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모든 순간에 깨어 있으려 하는 것이다. ‘지금-여기’의 실존을 느끼려 하는 것이다. “지금,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를 지속해 나가는 출발점이 ‘다시 태어나는 사건’이다. 그러면,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자기에게 맞는 고유한 느낌과 경험들이 생겨나기 시작할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고 불안해할 필요 없다. 그러한 불안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 갓 태어난 아기는 너무나 미숙한 존재인 것 같지만, 그 아이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이의 언어 습득 능력은 가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처럼 다시 태어나는 그대도, 그대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위대한 삶을 살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자. 그대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가장 경이로운 생명체인 '사람'이라는 존재로 태어났다. 이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아기가 태어날 때, 10달 동안 엄마 뱃속에 있다가 나오는 것처럼,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태어나서도 일정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기능을 하나하나씩 익혀간다. 그대에게도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다. 극적인 변화는 생명체에 별로 좋지 않다. 생명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시 태어나는 사건은 콤마 상태에서 각성상태로 깨어나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노라는 깊은 자각과 각성이 일어난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인생의 새로운 방향성이 설정된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 기준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이전에는 전혀 느끼지 않았던 새로운 불만족과 문제의식이 생겨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의 기능이 거의 작동하지 않았는데, 마음의 생명력이 커지면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 경로의존성 Path Dependency


생존의 방식에서 삶의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분명히 다시 태어나면 좋을 것 같은데,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변화에 대한 저항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만물에는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 현재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물질의 성질을 말한다.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 한다. 정지해 있는 물체를 움직이게 하거나 움직이는 물체를 정지하게 하려고 하면 그만한 힘이 외부에서 가해져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멀리 던진 공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공기의 저항과 중력 때문이다. 물체가 스스로 변화를 선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질계의 관성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것을 타성惰性이라고 한다. 타성에 젖은 사람은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잘 바뀌지 않는다. 누가 봐도 틀린 자기 방식을 끝까지 고집한다. 변화를 거부하는 힘, 타성이 그 사람의 인격 속에서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은 2가지이다.

생존과 삶.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이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꾸지는 않는다. 생존의 방식을 살았던 기간이 길었던 만큼 변화에 대한 저항은 크게 작용한다. 더 큰 외부의 힘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만큼 변화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결코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생존에서 삶으로 변화되는 일은 없다. 자신이 현재 어떤 경로에 서 있는지 주의하여 살펴보자. 그리고 그 길이 생존의 길이라면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삶의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변화의 시간이 늦어질수록 변화의 가능성은 낮아지게 된다. 모두가 그 길을 가고 있다고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다. 시대를 진보시키는 사람들은 항상 소수였다. 소수의 편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자.


관성은 개인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나타난다. 이를 ‘경로의존성’이라고 한다. 한 사회의 제도나 관습이 어떤 방향으로 정해지면, 그 길이 아무리 비효율적이라 할지라도 계속 유지하는 현상이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가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만큼 더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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