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은 Jan 17. 2024

#39 엄마, 괜찮다고 하면 괜찮아져?

 시간은 젊음을 앗아간다. 가만히 흐르기만 하면 좋겠지만 건강도, 색도, 기력도 앗아가며 흐른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평소에 잘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시샘하고, 원망하고, 무심하게 지낸다. 시시때때로 모질어지는 건 시간이 흐르는 걸 자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부쩍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피부가 예전 같지 않을 때, 새치를 발견할 때, 체하는 빈도가 잦아질 때, 구석구석 쑤시는 것이 느껴질 때 등 일상에서 나이가 드는 것을 체감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럴수록 나는 가장 가까운 두 얼굴이 떠오른다. 특히 엄마.     


 엄마는 늘 엄마 모습 그대로였다. 어릴 때부터 기억되는 그 변함없는 모습.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에게서도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엄마는 흰머리가 잘 나는 체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모들이 늘 염색할 때도 엄마는 염색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에게서도 흰머리가 생기는 게 눈에 띄게 보였다. 그런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려니 하고 시간에 넘겨줄 수 있었다.      


 내가 대학생 때였나, 유독 엄마가 예민한 때가 있었다. 흔히 겪는 갱년기 증상 같았다. 그런 줄만 알았는데 엄마에게 갑상선 암이 선고되었다. 건강검진 중에 우연히 발견해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때의 나는 다행이라고, 우연히라도 지금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암에 걸렸는데 어떻게 운이 좋을 수가 있고, 어떻게 다행일 수가 있겠는가.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요즘 갑상선 암은 암도 아니라고 괜찮을 거라고 했다. 괜찮다고 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을까, 그냥 가볍게, 잘, 넘어가기를 바랐던 것일까.      


 시간은 엄마에게 고통을 하나씩 던져주었다. 갑상선 수술을 시작으로 난소에 혹을 떼어 내는 수술과 최근에는 연골이 다 닳아 무릎 수술도 했다. 어느 날은 자식들 몰래 수술하려다 병간호가 필요해 나에게 전화한 적이 있었다. 전화하면서도 미안해하는 그 목소리에 걱정보다 짜증이 났다. 왜 그런 걸 미리 말하지 않고 숨기려 하는지, 그게 짜증이 났다. 그런 내가 싫었다. 늘 그런 식으로 걱정보다 짜증을 먼저 내는 자신이, 그리고 바로 후회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아직도 나는 그때의 내 마음과 행동의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겠다.      


 엄마랑 병원에 같이 있으면서 딱히 제대로 된 간호라는 것을 하지 못했다. 엄마가 불편한 것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고, 필요한 것을 미리 가져다주지 못했다. 기어이 엄마가 움직이려 하거나, 부탁해야만 움직이는 나였다. 엄마가 아픈데도 나는 그저 철딱서니 없는 딸이었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같이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맛있는 것을 같이 먹고, 같이 산책하는 것. 그뿐이었다. 그냥 지금 시간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시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엄마 좀 괜찮나?” “괜찮다.” “엄마 아직 아프나?” “괜찮다.” 엄마가 어떤지 물었을 때 엄마는 대부분 괜찮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괜찮다는 말 뒤에 ‘예전보다 괜찮지만, 아직 조금 아프다.’ ‘참을만하다.’ ‘걱정하지 마라.’라는 말이 숨겨져 있었을 텐데 나는 알지 못했다. 그냥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줄만 알았다. 내가 엄마가 되면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무심했던 지난날, 철없던 지난날, 표현에 서툴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남은 시간에 집중하려 한다. 후회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지나고 있음을 자주 알아차려야겠다. 나의 시간보다 엄마의 시간이 더 빨리 흐르고 있을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38 비밀은 그렇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