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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은 Jan 19. 2024

#40 HOLE

 그럴싸한 데이트였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갔다가 영화를 보니 거의 저녁이었다. 아직 비가 내리고 있어 근처 이자카야로 들어갔다. 나는 곧바로 따뜻한 사케를 주문했다. 하루 종일 밖에 있어서 그런지 힘이 빠지던 찰나였다. 데이지 않을 정도로만 따뜻하게 데워진 사케가 입술을 적시고 부드럽게 넘어가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마주 앉은 S가 보였다. 그는 내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해 보였다. 어린아이가 실수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얼굴이랄까. 그의 과한 행동이 불편해 지려 했지만 그대로 두었다. 덕분에 내 손에 휴지가 들려있고, 물 잔에 물이 따라져 있고, 수저가 세팅되어 있을 테니까. 단지 내가 창문을 자주 보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아차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비 오는 날 날 거 먹으면 탈 난댔는데...’ 생각하면서 안주로 나온 모둠 사시미를 젓가락으로 쿡쿡 찌르고 있던 찰나였다. “그 영화 어땠어? 그 배우 연기 진짜 잘하더라. 그치?” 그가 물어왔다. “응, 근데 내용은 이상하더라. 어찌어찌해서 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런 이야기는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아서 이질감 들더라.” 말이 끝나자마자 멈칫했다. 그는 나와 대화하고 싶을 뿐이었다. 영화는 핑곗거리일 뿐이었는데 그런 사랑 이야기 따위는 이질감이 든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애써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유독 창문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늘 다정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다정이라는 따뜻한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서였을까. 남들이 이상형을 물어볼 때 늘 “다정한 사람이요.”라고 답하던 나였다. 그는 내가 늘 바랐던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살가운 애정 표현을 잘하고 어딜 가든지 나를 먼저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채워지고 따듯해지기보다 바람이 새어 나가는 듯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더 컸다.     


 몇 년 전 헤어진 P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 마음속의 구멍은 그의 자리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가 창문을 바라보는 게 P의 자리를 더듬는 것이라는 걸 알면 S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을 질끈 감고 술과 함께 비워버렸다. P는 내게 최초의 다정한 사람이었다. 말투가 거친데 다정한 사람이 있다면 믿어지려나. P가 그랬다. 덩치도 크고, 키도 크고, 말투도 억센데 그와 함께 있으면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못난 모습일 것 같으면 숨겨야 하는 게 사랑인 줄 안던 나는 P를 만나 훨훨 날았다. “우리 오랜만에, 바다 앞에 거기 식당 갈래?” “이번에 드라마 새로 나왔는데 그거 엄청 재밌대!, 오늘은 집에서 그 드라마 몰아보는 거 어때? 아무 데도 나가기 없기!” 그와는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었고, 자연스러운 내 모습을 모두 보여줄 수 있었다. P는 내가 흐트러진 모습, 속 좁은 모습, 질투하는 모습, 우는 모습까지 모든 것을 보여줘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을 더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렇게 창문을 보는 걸까.      


 따뜻한 사케 몇 잔에 눈꺼풀이 주체할 수 없이 주저앉았다. 더는 견디기 힘들어 오늘은 S의 집에서 자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의 집에 도착해 대충 화장을 지우고 금세 잠에 들었다. 그가 머리를 오래 쓰다듬어 주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쯤 되었을까. 고요한 공기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S의 집에서 자는 날이면 늘 소음이 아니라 고요 때문에 눈을 떴다. 고요 속의 적막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겠지만. 하얀 실크 커튼 뒤로 아침이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침대 끝에 몸을 걸터앉았다. 잠들어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종일 나에게 맞춰주고 나를 살피느라 고단했을 텐데 잠든 얼굴마저도 구김이 없었다. 그저 새근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을 뿐이었다. 나는 창문이 열고 싶어졌다.     


 작은 창문에 달린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기 위해 일어섰다. 어젯밤 눈꺼풀처럼 발끝이 무거웠다.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영원히 날 수 없는 새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작지만 선명한 소리가 들렸다.   

  

어떤 빈자리는 평생 채워지지 않을지도 몰라. 

어떤 빈자리는 평생 채워지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그대로 S의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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