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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은 Jan 27. 2024

#44 꿈속에서 떨어지는 날이면 다리가 아팠다

 나는 어릴 적 유독 성장통을 많이 앓던 아이였다. 밤마다 다리가 아프다고 울면 엄마가 다리를 주물러주던 시간이 잦았다고 한다. 잊고 있던 시간이었다. 다리가 아프다고 울던 시절, 엄마가 다리를 주물러줄 만큼 자그마한 발과 다리를 가졌던 시절. 아득하게 밀려난 기억이었다. 어릴 때 나는 훌쩍훌쩍 자라는 아이였다. 자주 키를 쟀다. 곧은 벽에 발끝과 머리를 맞춰 서있으면 머리 위로 책이 콩 닿았다. 그렇게 그려진 눈금은 대중이 없었고 듬성듬성 벽에 오래도록 남겨졌다. 키가 크는 만큼 발도 빨리 자랐다. 신발이 닳을 시간도 없이 새 신발을 사야 해서 비싸고 좋은 신발을 살 필요도 없었다.    

  

 밤마다 떨어지는 꿈을 꾸며 다리 아파하던 아이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크고 작은 성장통을 겪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리가 아프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다른 곳이 아팠다. 어른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다리가 아닌 마음을 다독여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 시간을 다 겪어도 훌쩍 크거나 고통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물 위로 올라오고 싶어서 허우적거리지만, 발목에 커다란 추가 매달려있어 오래 발버둥 쳐야 겨우 숨이 쉬어졌다.     


 조금 수월하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는 없었을까.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에 왜 고통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일까. 어떤 마음은 다쳐도, 다쳐도 무뎌지지 않은 것이 있고, 어떤 상처는 발목의 추가 되어 종종 나를 끌어내리기도 한다. 아물지 않는 것,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얼마나 오래 나에게 통증으로 남을 것인지, 언젠가 아득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 만큼 멀어질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여전히 크고 작은 구덩이에 걸려 넘어지고, 다치고, 울기도 한다. 다만 눈물을 닦고, 다시 일어서서 의연하게 나아갈 힘이 있다. 결국 그 시간의 이름에 ‘성장통’이 붙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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