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은 Feb 05. 2024

#47 슬픔은 그곳에 두고


 슬픔이 한 번에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 예고 없이 찾아오면 나는 저항 없이 무너졌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동안 괜찮은 줄 알고 지내 온 시간이 와르르 주저앉았다. 금방 추스러질 감정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실컷 슬퍼해야 홀가분할 것 같았다. 나는 쉽게 슬퍼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저녁 6시 반, 조명 1개만 남겨두고 불을 껐다. 큰 텀블러 가득 얼음을 붓고, 위스키와 탄산수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슬픔에 빠질 수 있는 영화, 드라마를 신중하게 골랐다. 선택 기준은 나와 비슷한 크기의 슬픔이거나, 나보다 큰 슬픔이 담겨있는 내용일 것. 그동안 참 눈길이 가지 않던 ‘나의 아저씨’가 마침내 재생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하이볼을 다 마셔갈 때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잘 듣던 방법이었는데 이번에는 감정이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떠나야 했다. 급하게 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대충 짐을 챙겨 택시를 탔다. 아무 준비도 없이 떠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버스 안은 고요했다. 술기운이 살짝 올랐고, 이 모든 것이 현실 같지 않다고 생각할 때쯤 버스는 부산에 도착했다. 바다를 보기 위해 지하철을 2번 갈아탔다. 시간은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짐을 마구 욱여넣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우산까지 들고 밤바다를 잠시 걸었다. 이 밤에 갑작스럽게 떠나 청승맞게 바다를 걷고 있는 상황이 조금은 서글펐다. 하지만 힘찬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오래 걸을 순 없었다. 우선, 가방이 무거워서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고, 비에 젖은 모래가 어느새 바짓단을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늦기 전에 잘 곳을 구해야 했다. 급하게 주변 게스트하우스를 검색했지만 대부분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곳이었다. 고민하던 찰나에 바로 근처에 캡슐 호텔이 보였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로비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숙박이 가능했고, 친절한 직원의 안내를 받아 오늘 자야 할 내 공간에 짐을 내려놓았다.     


 당장 해결해야 할 것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감정이 추스르져 있었다. 조용히 잘 채비를 하고 좁은 공간에 누웠다. 마음이 지치고 참 긴 하루였는데 낯선 곳에 누우니 그냥 여행자의 마음만 남았다. 종일 나를 괴롭히던 감정과 생각들도 하나씩 정리되었다. 마침내 불을 끄고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와 대화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지난밤, 생각보다 깊은 잠을 잤고, 조금의 숙취만 빼면 개운한 아침이었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바깥 상황을 보려고 커튼을 열었더니 맞은편 창문으로 파란 바다가 보였다. 맑고 분명한 색으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얼른 체크 아웃을 하고 다시 바다 앞으로 갔다. 밝은 날의 바닷가에는 많은 사람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 이국적인 물건을 파는 외국인 아저씨, 사진을 찍는 사람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 어제와는 분명 다른 바닷가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나도 어제와 조금은 다른 사람이었다.     


 무작정 떠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조금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는 게 빠른 회복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생각했다. 언제고 훌쩍 떠날 수 있도록 “훌쩍 배낭”을 미리 싸두자고.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당장 떠나고 싶을 때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 보는 것도 좋겠다고. 어제는 슬픔에 잠겨서 탔던 버스를 오늘은 마땅한 배낭을 찾으며 가뿐하게 내렸다.      


 슬픔은 그곳에 두고.

매거진의 이전글 #46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